수원에서 시작해 수원에서 야구 인생을 마무리했다.
베테랑 투수 이보근이 17년 야구 인생을 뒤로 하고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그동안 없는 정답을 찾다가 오답만 수두룩하게 내고 있었다"라며 자신의 야구인생을
돌아온 이보근은 이제 운동 역학 트레이닝 코치로서 다른 야구 미생들의 오답을 찾아주고자 한다.
2005년 현대 유니콘스(2차 전체 39번 지명)에 입단한 이보근은 우리 히어로즈-서울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키움 히어로즈에서 오랜 기간 '히어로즈'를 대표하는 투수로 활약했다. 2020시즌을 앞두고
2차 드래프트를 통해 KT WIZ로 이적한 이보근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커리어 대부분을 불펜 투수로 보낸 이보근은 KBO리그 개인 통산 534경기에 등판해 38승 40패 21세이브
94홀드 평균자책 4.58 451탈삼진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 1.47을 기록했다. 2016시즌엔 시즌
25홀드로 홀드왕 개인 타이틀을 거머쥔 좋은 추억도 있다. 스포츠춘추가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투수로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소망한 '투수' 이보근의 마지막 소회를 직접 들어봤다.
수원에서 시작해 수원에서 마무리한 투수 이보근의 '17년 야구 인생'
2021시즌을 마치고 현역 연장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현역 은퇴를 결정한 계기가 먼저 궁금합니다.
딱 일주일 걸렸습니다(웃음). 집에서 일주일 정도 쉬니까 지금까지 참고 버텼던 몸 부위들이 다 아프기 시작하더군요.
1개월 정도 너무 아픈 몸으로 지내다 보니까 '이런 상태에서 계속 야구를 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사 다른 팀에서 저를 불러도 이건 민폐가 되겠다 싶었던 거죠. 자신감이 없어지는 순간 내려놓기 시작했던 겁니다.
가족들도 안타까워했겠습니다.
가족들은 당연히 현역 생활을 더 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습니다. 올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든요.
어떻게 1년이라도 더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몸이 너무 아프니까 자신이 없다는 말에 가족들도 이해를 해줬어요.
그래도 해마다 비시즌 운동에 식단 조절, 스프링캠프까지 바빴는데 이제 여유가 생겨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족여행도 가고요. 익숙하지 않은 삶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고 있죠(웃음).
그래도 17년 야구 인생을 정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 듯싶습니다.
가지고 있는 실력에 비해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거죠(웃음).
그냥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까 어느덧 17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남들보다 뛰어난 선수 생활을 못 했지만
제 한계 내에선 정말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어요.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것 하나만큼은 잘했다고 봅니다.
몇 명 안 남은 현대 유니콘스 출신 현역 선수였단 점도 눈에 들어옵니다.
2005년에 현대에 같이 입단해서 뛴 동료들 가운데 지금 남은 선수는 오재일(삼성 라이온즈) 한 명뿐이네요.
당시 현대에서 (유)한준이 형이 1년 선배여고, (황)재균이가 1년 후배였죠.
현대 시절엔 선배들이 무서웠고 1군에 올라갈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이었어요.
주로 2군에서 '언젠가 올라가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루하루 운동했습니다.
현대 유니콘스에서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하는 힘든 과정도 겪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어린 나이여서 오히려 걱정이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7년에 한참 야구단 해체 얘기가 나올 때 당시 현대연수원 원당 2군 야구장에서 매일 선배들이 회의를 했거든요.
선배들은 해체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고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셨죠. 저도 나이가 많았다면
아마 같이 심각하게 고민했을 텐데 어린 나이라 '어떻게든 풀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죠. 야구단 인수 과정을 겪어봤다는 추억이 남아 있는 정도입니다.
우리 히어로즈와 서울 히어로즈를 거쳐 넥센 히어로즈까지 또 파란만장한 변화가 이어집니다.
2008년에 우리 히어로즈가 됐을 때는 그냥 팀이 바뀌었구나 정도였는데 2009년 서울 히어로즈 때 여러
가지 팀 상황이 정말 어려웠어요. 다행히 넥센 히어로즈로 바뀌고 나서 팀 상황이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막연하게 하루하루 버틴 2군 투수에서 1군 홀드왕까지 "아내 덕분에 야구 인생 전환점 찾아"
히어로즈 초창기부터 사용됐던 강진 2군 야구장이 야구계에선 아직도 회자되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한 번 1군에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강진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잘 뚫렸는데
예전엔 국도로 가야했거든요. 버스가 도착은 안 하고 휴게소만 두 번 들르더라고요(웃음). 가는 길에
땅끝마을 비석도 보이고요. 거기서는 읍내에 나가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것 빼고는 야구밖에 할 게
없었어요. 또 1군에서 콜업을 받아도 아침에 출발해서 6시간이 걸려서 목동구장에 도착했습니다.
보통 콜업 당일 출전하는 상황이 잦으니까 2군 선수들은 다들 힘들었죠.
그래도 이보근 선수는 2009년부터 김시진 감독 체제 아래서 꾸준히 1군 등판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했습니다. 1군에서 자리를 잡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2008년 시즌 마지막 홈경기가 기억이 납니다. 당시 지금 아내와 만나고 있었는데 그때는 마지막
홈경기가 끝나면 팬들이 그라운드로 내려와 사인을 받는 문화가 있었어요. 아내가 마지막 홈경기를
왔죠. 그 전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제 자신이 너무 비참해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여자가 왔는데
제대로 경기에 못 나가는 2군 선수였으니까요. 그냥 막연하게 하루하루만 버티다가 그 순간
1군 선수로서 목동구장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생긴 거죠.
마음가짐과 자세가 완전히 달라진 거군요.
2009년 스프링캠프에 못 따라갔는데 정말 추운 한국에서 이 악물고 준비했습니다.
2009년 5월에 1군 등판 기회가 왔어요. 예전엔 항상 두렵고 무서운 1군 마운드였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아내를 위해서라도 나는 잘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죠.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지금 아내에게 매우 고마워해야 하는 부분이죠(웃음).
그때부터 1군 불펜 주축 투수로 야구 인생이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홀드왕 등극이 정점이었습니다.
2,000만 원 최저 연봉을 받다가 제대로 된 연봉 협상을 하는 선수가 됐습니다. 2015년 첫 아들이
태어난 것도 그 이상의 동기부여가 없었어요. 자식이 있는 가장으로서 준비한 2016시즌 결과가
바로 홀드왕이었죠. 그때 필승조 역할이 정말 버겁고 힘들었습니다. 당시 염경엽 감독님과 손혁 코치님,
박승민 코치님이 아니었다면 홀드왕은 어려웠을 거예요. 저를 믿어주시고 버티도록 잡아주신 덕분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집에 홀드왕과 500경기 출전 트로피가 있으니까 남들에게 말할 거리는 생긴 거죠(웃음).
우승 반지와 100홀드, 투수 이보근이 남긴 아쉬움 두 조각
2019시즌을 앞두고 생애 첫 FA 계약(3+1년 총액 19억 원)을 맺은 것도 야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당시 FA 신청서를 내려고 고척돔에 가는데 내고도 실감이 안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엔 전혀 생각도
안 했던 일이라 눈앞에서 현실이 되니까 신기하고 안 믿겼던 거죠. 금액을 떠나서 그동안 야구를 해왔던
것에서 보상을 받은 느낌이라 좋았어요. 또 히어로즈라는 팀에서 계속 뛰게 됐다는 점도 정말 감사했고요.
하지만, 2차 드래프트 이적으로 원 클럽 맨의 꿈이 결국 사라졌습니다.
당시 팀 분위기를 보면 어느 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니 현대 유니콘스 시절 뛰었던 수원으로 돌아가는 그림이라 이게 인연인 건가 싶었어요.
비록 정들었던 히어로즈를 떠났지만, 어떤 팀이든 저를 찾아주는
곳이라면 책임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공을 던져야 했어요.
KT 이적 첫해인 2020시즌(49경기 등판 3승 1패 6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 2.51)은 말 그대로 '회춘 모드'였습니다.
히어로즈 시절 인연이 있는 박승민 코치님과 함께 이승호 코치님까지 저를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2점대 평균자책 시즌을 보내면서 구단 창단 첫 가을야구까지 돕게 돼 정말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황재균 선수의 호수비를 보고 나온 이보근 선수의 익살스러운 표정도 화제가 된 기억이 납니다.
그 표정 덕분에 티셔츠도 나왔으니까요. 마운드 위에서 원래 표정이 풍부하고 리액션이
큰 편입니다. 아내는 평소에 보던 표정이라 그러려니 하더라고요(웃음).
2021시즌 팀 창단 첫 우승 때 함께하지 못 한 아쉬움이 남을 듯싶습니다.
제가 홀드왕도 받았고, FA도 해봤고, 올스타전도 가봤거든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우승 반지만 없었습니다.
다른 걸 떠나서 마지막엔 우승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가장 아쉬웠죠. 제 운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죠. 또 개인 통산 100홀드도 몇 개 안 남아서 아쉽고요.
KBO에서 세이브 몇 개를 홀드로 조금 바꿔주면 가능한데(웃음). 아깝습니다.
운동역학 전문 트레이닝 코치로 제2의 야구 인생 시작하는 이보근 "이제 오답을 찾아주려고요."
이제 '투수 이보근'을 뒤로 하고 새로운 야구 인생에 도전한다는 계획을 들었습니다. 어떤 꿈을 키우고 있습니까.
'SSTC'라고 조준행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야구과학연구소에서 운동역학 트레이닝 코치로 새 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선수 생활하는 내내 몸이 너무 많이 아팠기에 야구하는 몸의 움직임에 대해
과학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운 좋게 그런 기회가 주어져서 중학교
3학년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웃음).
추구하고 싶은 방향성이 무엇입니까.
저는 야구하면서 왜 아픈지 왜 아파야 하는지 모르고 공을 던졌습니다. 막연하게 통증을 버티면서
운동한 거였죠. 사실 야구에 정답은 없는데 오답은 있잖아요. 저는 17년 동안 없는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서 오답만 주구장창 나오게 한 겁니다. 알고 보니 야구는 오답을 피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종목이었죠. 다른 선수들은 저처럼 오답을 내면서 통증과 싸우기보다는
오답을 피하면서 상대와 싸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운동역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가야 할 길에 더 확신을 느꼈겠습니다.
제가 왜 나이를 먹고 구속이 떨어졌는지를 이제야 깨달은 거죠(웃음). 그런 걸 과학적으로 하나하나
배우고 알아가는 재미가 확실히 있어요. 물론 배우고 공부하는 게 어렵기도 한데 겉보기와 다르게
제가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 걸 좋아하거든요. 아무래도 학생선수들이 많이 찾아오기에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쉽게 전달할지 고민하려고 합니다.
남은 야구인생에선 오답을 찾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이보근을 기억하는 야구팬들에겐 '투수 이보근'으로서 어떤 마지막 인사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까.
제가 그렇게 인기 있었던 선수는 아니라서(웃음). 먼저 히어로즈 팬들에겐 힘든 상황에서도 강팀답게
꾸준한 성적을 내는 선수들에게 많은 응원을 부탁드린단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KT WIZ 팬들도
창단 첫 우승을 만든 선수들에게 야구장에서 많은 응원을 해주셨으면 좋겠고요.
이제 저도 선수들을 응원하는 입장이라 이런 말이 먼저 나오게 됩니다.
예전엔 그냥 제가 나가면 믿을 수 있는 투수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건
제 욕심이었던 듯싶고요. 그 정도 선수도 못 됐던 느낌이라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냥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공을 던졌던 투수로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노력 하나만큼은
열심히 했던 '투수 이보근'으로 기억해주세요. 17년 동안 항상 감사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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