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을 펼치는 데에 단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김시완 원장은 지금의 길에 애정과 확신이 있었다.
어시스트가 한국 유소년 농구 발전을 위해 펼치는 프로젝트인 어포유(Assist For Youth).
그 첫 번째 파트너로 합류한 TOP농구교실을 이끌고 있는 김시완 원장은 엘리트 선수 출신이다.
아직 그의 동기들이 KBL에서 뛰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름이 어색할 수 있다.
김시완 원장은 여천중과 여수전자화양고를 거쳐 한양대 2학년 시절까지 농구공을 잡았던 김민규다.
최근에 진행한 개명에 대해 김 원장은 "어렸을 때부터 길을 지나다니면 개명하란 말을 많이 들었다(웃음).
우연히 온 기회에 철학관에 갔다 개명을 제안 받아서 최근에 하게 됐는데, 아직 내 이름이 어색하다"라고 말했다.
처음 유니폼을 받아들었던 시절을 떠올린 김시완 원장은 "중학교 2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고향인 여수에서 길을 가다 키가 크다고 농구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 사정으로 대학교
2학년 때 농구를 그만두고 곧장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게 지금까지 왔다"며, 입을 열었다.
첫 꿈을 내려놓는 기분이 시원치는 않았지만, 김 원장은 오래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농구를 그만뒀을 땐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했었다.
나도 농구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친한 친구들이 프로에 가는 모습을 보니 내가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마라토너 같았다.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고,
믿어준 분들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이 컸다"며 당시의 솔직한 심경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만둔 날부터 부모님께 용돈을 100원도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농구부를 나온 다음 날 바로 농구교실에 취직해 일을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엘리트
지도자는 불가능했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고민도 하지 않고 이 길을 택했다"고 덧붙였다.
2012년 5월, 김시완 원장이 SNS에 농구를 그만뒀다고 게시물을 올린 날,
현재 프로에 있는 그의 친구들은 '바보같이 왜 지금 그만두냐'라는 연락을 해왔다고.
그럼에도 김시완 원장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10년 동안 뚝심 있게 걸어왔다.
유소년 지도자로서의 지난 시간을 돌아본 그는
"어느새 스스로를 돌아보니 내가 이 일을 하는 걸 좋아하고 있었다.
처음엔 일이 맞을까 고민도 조금 있었지만,
지금은 유소년들과 함께하고 있는 내가 너무 좋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란 확신이 들었고,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며 미소 지었다.
물론 농구교실을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식당처럼 레시피가 있는 게 아니었다"고 말을 이어간 김 원장은
"사실 아직도 농구교실의 시스템은 숙제다. 체육관을 찾아주는 회원들과 농구교실이
돌아가게 해주는 직원들의 중간점을 찾아나가고 있다.
그래도 항상 소통을 중시했기에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시완 원장은 "조금 솔직해지자면, 처음엔 내가 뭘 해야 잘 먹고 잘
살까란 생각에 농구교실을 연 것도 있었다. 지금은 열심히 달리다 보니 좋은 에너지를
가진 친구들도 함께하게 됐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그래서 책임감이 정말 커졌고, 앞으로도 이 책임감을 지켜내기
위해서 더 노력할 것"이라며 유소년 지도자로서의 더 큰 발전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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