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중계 커뮤니티 토쟁이티비 - 동부산성 문지기 박지현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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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중계 커뮤니티 토쟁이티비 - 동부산성 문지기 박지현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

토쟁이티비 0 500 2022.03.28 08:07

누군가는 불운의 아이콘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 

박지현은 ‘동부산성’의 주축으로 3차례 챔피언결정전을 치렀다는 자부심이 컸다. 

그 어느 팀보다도 애정을 갖고 있었던 DB에서 

스스로 나온 것도 결국 DB를 생각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본 기사는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Q.선수 시절 얘기를 먼저 하고 싶다. 

2002 드래프트 전체 4순위로 오리온(당시 동양)에 지명될 당시 기분은 어땠나?


A.예상 순위는 6순위 정도였고 가드가 약한 SK 빅스(현 한국가스공사)에 갈 거란 얘기도 들었다. 

생각보다 높은 순위였던 데다 오리온은 생각도 못했다. 

4순위로 뽑아주셔서 감사했지만 (김)승현이 형이 있어서 많이 못 뛸 것 같았다. 

구단에서는 나를 필요로 했고 승현이 형의 군 입대에 대비해 뽑았다고 하셨지만, 

나는 많은 시간을 뛸 수 있는 팀을 원했다. 감사한 마음, 속상한 마음 반반이었던 것 같다.


Q.김승현이 있다 보니 데뷔시즌에 51경기 평균 16분 38초를 뛰는 데에 그쳤다. 

종종 2가드 시스템을 활용하기도 했지만 아쉬움이 컸을 것 같다.


A.많이 속상했다. 데뷔하기 전부터 승현이 형이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땄다.

 부럽기도 했고, ‘앞으로 승현이 형만 계속 뛰겠구나’란 생각도 들었다.

 사실 첫 시즌부터 트레이드 소문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거론된 팀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무산됐다. 

아쉬움이 큰 시즌이었지만 승현이 형이 손가락부상 때문에 6경기에 결장했다. 

그 기간에 내가 많이 뛰었는데 5연승을 했다. 

그때 실력을 인정받아서 그나마 2가드 시스템이 나왔다. 

승현이 형의 부상이 없었다면 출전시간은 더 적었을 것이다.


Q.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신인 때부터 챔피언결정전에 출전했고, 

희대의 15초 사건도 경험했다. 그 경기는 결장했는데 벤치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진 못했나?


A.경기에 집중하느라 전혀 못 느꼈다. 그런 일 때문에 기회를 놓쳐 안타까웠다. 

그래도 승현이 형을 막을 선수가 없었고, 

팀 분위기도 워낙 좋았기 때문에 오리온에서 한 번 더 우승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Q.상무에 있을 때 오리온이 전자랜드(현 한국가스공사)로부터 리 벤슨을 영입했고, 

이때 합의한 후속 트레이드가 박지현의 전자랜드 이적이었다. 

추후 LG까지 포함된 삼각 트레이드가 됐지만…. 전자랜드 이적 소식은 언제 들었나?


A.말년휴가 때 김진 감독님으로부터 들었다. 

승현이 형과 더 뛰고 싶어서 그냥 남아있으면 안 되냐고 말씀드렸다.

 “제가 보내달라고 할 땐 안 보내주시더니…”라며 말이다(웃음).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된다. 

구단끼리 합의한 부분이라 어쩔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Q.데뷔 초기에 트레이드를 원했는데 제대할 땐 김승현과 뛰고 싶다고 마음이 바뀐 이유는?


A.함께 뛰면 재밌었다. 신인 때는 많이 못 뛰는 것에 대한 속상한 마음이 컸지만, 

상무에서 승현이 형과 계속 뛰면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온의 팀 분위기도 굉장히 좋았고 데뷔한 팀이어서 정도 들었다. 

삼각 트레이드로 LG에 가게 된 건 기사 나오기 전 알았다. 

유도훈 당시 LG 코치님이 만나자고 연락하셔서 눈치를 챘다.


Q.LG에서도 첫 시즌에 우승 기회를 맞았지만 놓쳤다. 

정규리그를 2위로 마쳤지만 4강에서 퍼비스 파스코가 불미스러운 일로 퇴출됐다.


A.팀 분위기나 느낌은 좋았다. 함께 생활한 선수들은 파스코가 착하다는 걸 안다. 

코트에서의 전투력, 승부욕이 워낙 강해 돌발행동이 나왔는데 상대 팀에서 계속 자극한 부분도 있었다. 

파스코는 “LG 선수인데 왜 나를 안 도와주고 참으라고만 하냐”라고 생각했다. 내 편이 없다는 생각에 흥분한 것 같다.


Q.2008-2009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사인앤트레이드를 통해 DB(당시 동부)로 이적했다.


A.만감이 교차했다. ‘뼈를 묻겠다’라는 각오로 LG에 왔고, 구단에서도 잡을 거라 말씀해주셨다. 

지금도 사람 말을 잘 믿는데 그땐 더 순진했다(웃음). (이)현민이, 

(임)효성이에 (전)형수 형까지 있었는데 현민이의 입대 계획이 꼬였다. 

팀 입장에서는 교통정리가 필요했고, 그래서 내가 DB로 가게 됐다. 

(김)주성이와 중-고-대학에서 같이 뛰었는데 프로에서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돌아보면 나에겐 좋은 기회였다. DB에 있을 때 몸이 제일 좋았고, 강동희 감독님을 만나 배운 것도 많았다. 

첫 시즌에 적응을 못해 힘들었지만 (표)명일이 형이 많이 도와주셨다. 

할 수 있다는 격려를 많이 해주셨고, 적응을 마친 후 농구를 재밌게 할 수 있었다.


Q.강동희 감독과의 첫 시즌. 어떤 부분에 적응을 못했다는 건가?


A.예를 들어 공격 진영에 선수가 있다면, 나는 수비 진영에서 곧바로 공을 줬다. 

LG 시절 (현)주엽이 형에게 그렇게 패스했다. 

그런데 강동희 감독님은 패스하지 말고 가드가 치고 넘어와서 찬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팀마다 색깔이 달랐고, FA 첫 시즌이어서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던 것 같다. 

감독님께 진짜 많이 혼났다. 

워낙 대단한 선수였기 때문에 감독님 입장에선 내가 많이 부족해 보였을 것이다. 

당시 DB는 유독 중앙대 출신이 많았다. 주성이를 비롯해 (황)진원이 형, (윤)호영이가 많이 도와줬다.


Q.현대모비스(현 모비스)와의 2011-2012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나온 작전타임 페이크도 빼놓을 수 없다.


A.감독님이 정규리그에서 한 번 시도해보라고 얘기하신 적은 있었다. 

룰을 어긴 건 아니지만 달리 생각하면 양아치(?) 같은 짓이기도 했다(웃음).

‘해봐야지’라며 노린 건 아니었다.

 감독님이 작전타임 사인을 주셔서 벤치로 가는데 상대팀 선수가 끝까지 안 따라오더라. 

틈이 보여서 한 건데 욕을 많이 먹었다.

 10년 전 일인데 휘문중 A코치로 있을 때 학생들이 영상을 보여줬다.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했다’ 싶었다. 

이제는 선수가 작전타임을 부를 수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하지 않나.


Q.박지현하면 껌도 빼놓을 수 없다. 

DB 팬들 사이에서 “박지현이 자일리톨 광고 모델해야 한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A.껌은 프로에 오면서 앂게 됐다. 대학 때도 앂었다면 엄청 혼났을 것이다(웃음). 

신인이다 보니 긴장이 많이 됐는데 몇몇 선배들을 따라 앂어보니 긴장이 풀렸다. 

승현이 형이 (최)명도 형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 때 껌을 앂고

 있는 장면이 찍혀 팀에서 잠시 껌을 못 앂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제외하면 은퇴할 때까지 계속 껌을 앂었다. 껌을 안 앂으면 루틴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실수로 뱉은 적은 없었나?)왜 없었겠나. 100경기 중 한두 번 정도 뱉었다. 

그래도 항상 수습을 잘했다. 내가 껌 뱉은 거 본 적 없지 않나. 실수로 삼킨 적도 있었다(웃음).


Q.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6-2017시즌에도 51경기 평균 18분 이상을 소화했다. 한 시즌 더 뛸 순 없었던 건가?


사실 신장에 문제가 있었다. 33살쯤 알게 됐고, 이후 오프시즌마다 검사했는데 2015년에는 검사를 안 받았다. 

왠지 받으면 은퇴해야 할 것 같다는 겁이 났다. 그래서 미루다 2016년에 검사를 받았는데 “운동하면 안 된다.

 하더라도 조절해야 한다”라는 진단을 받았다. 운동선수인데 조절하면서 뛸 순 없지 않나. 

팀이 배려해주셔서 체력 전지훈련을 웨이트 트레이닝, 수영으로 대체했지만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했다.

 출전시간은 (두)경민이가 다쳐서 많았던 것이다. 시즌 끝난 후 이상범 감독님도 새로 오셨고,

 원하는 전력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기에 부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은퇴 후 곧바로 전력분석을 맡겨주셔서 감사했다.


Q.건강은 이제 괜찮은 건가?

A.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불치병은 아니고, 

약도 정기적으로 먹고 있다. 관리만 잘하면 괜찮다. 안 좋아하는 술도 안 마셔도 되니 좋다.


Q.챔피언결정전에 4차례나 올랐고, 총 21경기를 치렀지만 결국 우승을 못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20경기 이상 뛴 선수 가운데 우승 경험이 없는 유일한 선수다.


A.농구는 개인운동이 아니고, 우승을 위해선 모든 상황이 다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우승하는 것도 아니다. 운도 없었고, 내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 있지만, 

DB에서 주축으로 뛰며 3차례 챔피언결정전을 치렀다. 

그것만 해도 행복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챔피언결정전 못 가본 선수도 많지 않나.


Q.돌아보면 정규리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2011-2012시즌 준우승이 가장 아쉬울 것 같다.


A.맞다. 누가 봐도 DB가 우승하는 시즌이었고, 나도 당연히 할 거라 생각했다. 

2010-2011시즌에 KCC와 챔피언결정전을 치렀는데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납회식 때 강동희 감독님께 찾아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못했습니다. 

다음 시즌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오프시즌 때 데뷔 후 가장 열심히 훈련했다. 

그리고 시즌을 맞았고, 어려운 경기를 몇 번 따내며 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상대가 우리 앞에서 아무 것도 못한다’란 느낌을 받았다. 뒤에 주성이, 호영이, 

로드 벤슨이 있어서 앞선 수비를 더 과감하게 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당시 DB의 수비농구를 두고 “재미없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선수들은 정말 힘들게 준비했다. 

득점하는 것보다 못 넣게 하는 게 더 힘들다. 그 수비를 익히기까지 꼬박 2시즌이 걸렸다. 

물론 관중 입장에서 득점이 적으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최근 LG가 41점하지 않았나.

 ‘우리도 그때 41실점을 어떻게 했지? 관중들은 정말 재미없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웃음).


Q.챔피언결정전에서는 KGC의 어떤 부분에 밀렸던 것 같나?


A.정규리그, 플레이오프에서 KGC가 달랐던 점은 하나다.

 로드니 화이트 대신 크리스 다니엘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화이트였다면 KGC가 우승 못했을 것이다. 나이도 차이가 있었다.

DB는 호영이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30대였다. 

그래서 KGC가 압박수비를 많이 한 반면, 우리는 그걸 못했다. 

체력에서 밀린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Q.단 한 시즌 만에 DB 전력분석을 그만 뒀다. 이유가 무엇이었나?


A.팀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나로선 처음 접한 업무였고, 

그래서 사수였던 (배)길태 형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가 못한 부분을 길태 형이 다시 만들어주셨고,

 이상범 감독님과 코치님들도 배려해주셨는데 몸이 안 좋아졌다.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감독님, 이흥섭 차장님(현 사무국장)은 집에서 조금 쉬다 돌아와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러면 길태 형이 내 일까지 다 해야 하지 않나. 한동안 재택근무를 했지만, 

복귀 후 몸이 또 안 좋아지면 진짜 민폐 끼치는 것 아닌가. 

구단에서는 끝까지 좋게 말씀해주셨지만 나로선 미안한 마음이 컸다.


Q.데이터를 받는 입장에서 데이터를 만드는 입장이 되니 전력분석의 고충을 알게 됐을 것 같다.


A.길태 형에게 더 미안해졌다. 선수 시절에는 패턴, 데이터를 받으면 한 번 보고 말았다. 

근데 그 자료가 10분 만에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다. 1경기만 보고 만들 수도 없다. 

영상 작업을 하면서 진짜 힘든 직업이라는 걸 알았다. 선수들은 모른다. 

내가 직접 해보니 전력분석 자료를 허투루 넘기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각 팀 전력분석들이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선수들이 알았으면 한다.


Q.전력분석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


A.홈경기에서 은퇴식을 했는데 끝난 후 곧바로 옷 갈아입고 영상 작업을 했다. 

새벽 3시쯤 마무리됐는데 계속 파일 저장이 안 되더라. 그 시간에 길태 형을 깨울 순 없지 않나. 

3시간 동안 붙잡고 있으면서 ‘방금 은퇴식 했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싶었다.

 한숨도 못 자고 아침에 길태 형에게 물어봤는데 제목에 특수문자가 들어가서 저장이 안 된 것이었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다 보니 이런 사소한 부분도 해결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때 특히 심적으로 힘들었다. 은퇴식 때문에 부산에서 부모님이 오셨고, 처가 식구들은 대전에서 오셨다. 

‘전력분석 안 했으면 끝나고 다 같이 식사라도 했을 텐데…’ 싶었다. 

물론 팀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신 건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날은 스스로에게 화도 나고 너무 힘들었다. 

길태 형이 “적응되면 괜찮을 거야”라고 하셨지만 내가 해야 할 일까지 다 하셔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컸다.


Q.그러고 보니 전력분석 첫 시즌에도 DB가 챔피언결정전에서 준우승을 했다.


A.그때도 당연히 우승할 거라 생각했다. ‘선수 때는 운이 없었는데 스태프가 되니 운이 따르는구나. 

드디어 우승반지 생기는구나’ 싶었다. 

전력상 DB가 SK보다 우세하다고 봤다. 2연승 후 4연패를 당했던 거라 더 허무했다.


Q.모교가 아닌데 휘문중 A코치는 어떻게 맡았던 건가?


A,DB에서 나온 후 1년 넘게 쉬었고, 최종훈 휘문중 코치가 나이는 같지만 1년 후배다. 

혹시 생각 있냐고 물어보는데 재밌을 것 같았다. 2019년 8월에 부임했다. 

원래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강동희 감독님께 조언을 구했고, 

중앙대 쪽을 먼저 알아보기도 했다. 중앙대는 안 될 것 같았고, 그래서 휘문중으로 가게 됐다.


Q.지난 1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휘문중에서 선수들을 지도했다.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너무 재밌었다. 부임 당시는 멤버가 좋았지만, 지난해는 우승권 전력이 아니었다. 

유소년 출신도 있고, 농구를 늦게 시작한 선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보이지만 시간이 필요한 선수들이어서 우승은 생각도 못했는데 첫 대회(춘계)부터 우승을 했다.

 그래서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고 1년을 치렀다. 김천대회만 8강에서 떨어졌을 뿐, 나머지 대회에서는 모두 우승했다.


Q.그럼에도 휘문중 A코치를 그만둔 이유는 무엇인가?


A.중학교 코치는 너무 재밌는 일이었다. 

금전적으로 힘든 것만 아니었다면 계속 했을 텐데 가장이다 보니 이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석)명준이와 (김)중길이 형이 대표로 있는 유소년 축구, 농구교실(제이제이클랜)에서 연락이 왔다.

 임대체육관을 쓰다 규모를 확장해 새로 쓰게 될 전용체육관을 짓고 있으니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공사는 1월에 마무리될 계획이었는데 3월로 미뤄졌다.

 회원이 800명 정도 되는데 확장된 체육관에서는 1300~1400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Q.유소년 농구교실 사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는데 각오가 있다면?


A.아무래도 취미로 농구를 즐기는 학생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재미로 농구를 하다 진지하게 꿈을 꾸는 이들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농구인이다. 한국농구를 위해 선수로서 잠재력이 보이는 학생이 있다면 추천해줄 수도 있다. 

앞으로도 농구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


DB가 KGC에 우승을 넘겨준 후 맞은 2012-2013시즌. 박지현은 데뷔 후 처음으로 주장을 맡았고, 

당시 기자에게 “명일이 형의 리더십을 본받고 싶다”라는 각오를 전한 바 있다. 

故 표명일과 같은 팀에서 뛴 건 DB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2009-2010시즌이 유일했지만, 

박지현에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수로도, 코치로도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故 표명일은 병마와 싸우다 1월에 세상을 떠났고, 

박지현은 故 표명일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점프볼에 전했다. “코트에서는 정말 무서운 선배였다. 

운동을 열심히 안 하는 선수들을 많이 혼내셨다. 

하지만 코트 밖에서는 다정했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그런 부분을 본받고 싶었다.

 노장인데도 솔선수범의 자세로 열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후배들도 열심히 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체력훈련 할 때 ‘다른 선수들은 몰라도 명일이 형에겐 지지 말자’라고 다짐했을 정도다.

 (투병)소식을 들은 후 연락을 못 드린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휘문중 있을 때 둘째 아들(표시우)을 잠깐 지도하기도 했다. 빈소에서 형수님, 

두 아들을 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최근에 (표)시우 졸업식도 다녀왔다. 

열심히 농구 하길 바라고, 형수님도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주셨으면 한다. 

명일이 형은 내가 존경했던 선배다. 몸 관리, 농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동안 농구에 열심히 임했던 만큼, 이제는 편히 쉬셨으면 한다. 

시우도 명일이 형처럼 열심히 농구 할 거고, 나도 도와줄 것이다. 그동안 감사했고 종종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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