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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쟁이티비 0 390 2022.03.08 12:15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존경을 받는 인물답게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줄 

그럴 듯한 말을 남길 수도 있었지만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인생을 평가했다.


사실 그의 말은 어떤 인생에 대한 희망찬 명언보다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고 있다. 

사람은 어떤 집,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출발점이 달라지며 

똑같은 분야에서 함께 노력을 하더라도 재능의 격차로 인해 우열이 갈리기도한다. 

거기에 때론 좋은 쪽으로 때론 나쁜 쪽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변수와 타이밍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의 고무공이라 할수 있다.


한때 대한민국 역대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로 명성을 떨쳤던 김영희(58‧205cm)에게도 인생은 그런 존재다. 

평범한 체격을 가지고 있던 보통의 집에서 매우 큰 아이로 성장한 것부터 범상치않았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워낙 체격이 큰 관계로 원치않는 

시선을 자꾸 받았고 이래저래 평탄하지않은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운동도 딱히 원해서 한 것은 아니다. 체격조건을 보고 일찍부터 주변에서 

관심을 보였고 사실상 타의에 의해 운동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신체조건을 가진 그녀에 대한 농구계의 관심은 상당했다. 

국제무대에서 늘 높이 때문에 고전하기 일쑤였던지라 ‘우리도 이제 높이로 덕좀 보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특히 아시아 라이벌 중국의 진월방(207cm)과 정하이샤(204cm)를 막을 카드가 생겼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 

김영희가 제공권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가운데 투지와 기술이 좋은 박찬숙, 

성정아 등이 조화를 이룬다면 여자농구의 포스트도 한층 강해질 것으로 주목받았다.


아쉽게도 김영희는 기대 만큼의 활약은 해주지 못했다. 국내리그에서는 기복은 있었지만 

압도적 높이를 종종 과시하기도 했으나 무대가 국제전으로 바뀌면 잘 통하지 않았다. 

대등한 사이즈에 기술, 운동능력까지 더좋은 매치업 상대들에게 지워졌던 이유가 크다. 

높이의 위력을 살릴 수 있는 팀과의 대결에서는 느린 발로 인해 효과가 감소됐다.


그렇다고 김영희가 열심히 안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던지라 경기는 물론 훈련시에도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과거 동료는 “당시에는 신체조건에 비해 기량 발전 등이 느리고 훈련 등도 잘 

못따라오는 듯 해서 의아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알고보니 지속적으로 몸상태가 안좋았다. 

고통과 싸우며 힘겹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진작 체계적인 몸관리와 치료에

 들어갔다면 여러 가지로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 같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료의 말처럼 김영희는 나쁜 몸 상태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아프다고 말하면 투지가 없다는 꾸중을 듣던 분위기상 대다수 선수들이 참아야 했던 시대였다. 

지금과 달리 선수생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87년 뇌종양으로 반신마비가 와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나서야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도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았다. 

이후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2002년이 되어서야 거인병(말단비대증)에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짧은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병마에 쓰러진 이후 김영희의 삶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완치되지않은 병으로 인해 병원을 내집처럼 오가야했고 일상생활에서도 고통에 시달렸다.

 그나마 의지하던 부모님을 차례로 떠나버린 후에는 극심한 외로움과 심적고통에 몸부림쳤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치며 말 그대로 지금까지 버티며 살고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도움의 손길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각 단체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물론 과거 농구 동료 및 지인들도 십시일반으로 마음을 보탰다. 

하지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워낙 상황이 장기적으로 오래가니 주변의 관심도 조금씩 줄어갔다. 

아무리 상황이 딱하더라도 각자 사정이 있는 상황에서 항상 책임져주고 돌봐준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영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는지라 주변에 늘 감사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이며

 앞으로도 악착같이 삶의 끈을 놓지않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다.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않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농구인 김영희, 그녀의 과거와 현재 속으로 ‘농구人터뷰’가 함께 들어가보았다.


“건강상태요…, 솔직히 많이 안좋습니다”


Q.요새 건강상태는 어떠신지요?


많이 안좋습니다. 더 안좋아졌어요.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항상 긍정적으로 먹고 있지만 몸이 나빠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네요. 

입원도 자주하는데 최근에도 병원신세를 지고 왔습니다. 

입원하고 나오니까 몸이 더 안좋아진 것 같아요. 걷는게 힘들다보니 바깥세상도 못나가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Q.최근 여러 채널 등을 통해 소식이 전해지면서 마음을 나누는 분들이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최근에 언론에 공개된 허재, 서장훈님 등을 비롯해 마음써주시는분들이 계셔서 힘든 상황에서 기운을 얻고 있습니다. 

당장 어떻게 은혜를 갚을 방법은 없으니 제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이 보답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Q.성격이 무척 긍정적이고 밝아보이세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최근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정말이지 죽음 앞에서 살아돌아왔어요. 

완전히 기절한 상태에서 응급차를 타고 실려갔는데 열흘동안 깨어나지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옆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도와주는 언니가 계세요. 의식을 못찾고 있는 저를 보고 많이 놀라고 걱정했다고해요.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봤는데 다른 곳은 특별히 더 나빠진 곳이 없었어요. 

문제는 30년 전에 수술한 머리였어요. 고여있는 피를 뽑아내고나니까 그때서야 의식이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2개월 가량을 누워있다가 퇴원하게 되었어요. 주치의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다시 한번 이번같은 증세로 병원을 오게된다면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요. 

잠깐동안 정신이 멍해졌어요. 난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지금 죽는 것은 너무 빠른데…, 

벌써 죽기 싫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고싶다는 갈망이 더 커지더라고요. 

어쨌거나 이번처럼 크게 아프든 아니면 작게 아프든 병원을 내집처럼 자주 드나들다 

보니까 심적으로 내려놓게 되는 것도 많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중이에요. 

고민하고 한탄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잖아요.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Q.몸이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잠은 잘 주무시나요?


남들처럼 푹 자본지 오래됐어요. 수시로 깨요. 최근에도 2시간에 한번씩 깹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아, 현재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일종의 생존신고같아요. 

그러고 아침결에 마지막으로 깼을 때는 ’이렇게 아침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해요.

 어찌보면 당연하게 자고 깨어나는 일상이 저에게는 매일매일 기적처럼 다가와요. 

최근에는 눈도 좀 불편해요. 당시 머릿 속에 기구를 넣어서 뇌 근처에 뭉쳐있던 피를 뽑아내는 

수술을 할 때 얼굴 반쪽을 마취했는데 퇴원해서도 한동안 마취가 풀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 곳을 오래 쳐다보는 등 눈을 많이 쓰면 피로가 몰려오고 불편해지고 막 그래요.


Q.생활이 넉넉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병원비 등이 부담으로 작용할 때도 많을 듯 싶어요.


솔직히 말씀드릴께요. 많이 안좋습니다. 정말 부담스러워요. 입원해서도 ‘돈이 얼마나 나올까…’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어요. 이번에 입원했을 때도 병원비를 다 갚지못하고 퇴원했어요. 

건강보험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보험이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돈을 내야 되거든요. 

다행히 문화체육부장관님께서 특별보조금 1000만 원을 지원해주셔서 급한 불을 끌수 있었습니다. 

몸이 아프기는 하지만 저는 좀 더 살다가 가고싶은 마음이 큽니다. 

늘 병원비가 어깨를 짓누고있는 느낌이에요. 이 자리를 빌어서 많은 후원 부탁드린다는 말씀드립니다. 

보통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런 말을 안하지만 삶이 달린 상황인지라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게되네요.


Q.살고 계신 방이 8평 남짓하다는데 많이 불편하실 것 같아요.


8평 아니에요. 5평입니다. 계속 살다보니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제 체격을 생각했을 때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맞추고 살아야죠. 

찾아오시는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도 버리고 쇼파 하나만 가져다놓았어요. 

거기서 웅크리고 잠을 잡니다. 이 좁은 방에 침대까지 있으면 손님이 와도 앉을데가 없거든요. 


Q.여전히 고정수입원은 체육 연금 70만원인가요?


맞습니다. 체육 연금 70만원이 전부입니다. 돈이야 제가 제대로 벌 수 없는 상황이니 큰 욕심을 내지않습니다.

 문제는 아플 때마다 크게 들어가는 병원비죠. 

다행히 제가 현재 다니고있는 부천카톨릭성모병원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전히 거인병은 낫지않고 진행중입니다. 계속된 치료를 통해 겨우겨우 잡아놓고 있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제 병은 몸뿐만 아니라 안의 장기까지 커지는 병이에요. 

기존에 증세를 보였던 장기는 약물 치료등으로 어느 정도 막아진 

상태인데 방광 등 다른 부분까지도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병마와 싸워야 될 운명인 듯 싶습니다.

 제가 인터뷰 등에서 대놓고 후원을 부탁드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Q.부모님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맞습니다. 부모님은 진작에 돌아가셨습니다. 

가장 믿고있던 보금자리였는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자꾸 생각나고 빈자리가 너무 크네요. 

모든 자식들이 그렇겠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정신적 위안을 얻고 있었거든요.

현재 남아있는 가족은 남동생 부부뿐입니다. 동생은 저랑 5년차이거든요. 

동생 역시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키가 크지 않습니다. 175cm정도 되고 평범하게 살고있어요.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 틈틈이 누나를 돌아봐주고 생각해주는 마음이 남달라요. 

동생도 이제 회사 정년퇴직 할 날이 얼마 안남았습니다. 

빡빡한 봉급으로 딸 둘을 키우고 있는 입장이라 본인 가정 꾸려나가기도 쉽지않아요.

예전에 병원비가 많이 나왔을 때 동생이 카드로 긁은 적도 있는데, 

나중에 카드빚 갚느라고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너무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이번에도 자꾸 내려고 하는 것을 제가 필사적으로 막았어요. 더 이상은 빚지지 말라고요. 

유일한 동생이라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너무너무 예뻐합니다.


Q.국민영웅중 한분이시잖아요. 

많은 분들이 사연을 듣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응원하는 분위기입니다.


그저 저는 죄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좀 더 건강한 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는데 늘 아픈 모습인지라 저 역시도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그래도 항상 힘은 잃지 않고 있습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의 성원이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끈입니다.

 걱정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열심히도 했지만 키 큰 덕도 많이 봤습니다”


Q.본래 초등학교때 배구를 하다가 6학년때 농구로 바꾸셨다면서요?


초등학교 때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어요. 

5학년때 키가 너무 크니까 배구를 권유해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기본기는 부족한 편이었지만 키가 크니까 상대방이 스파이크를 때리면 저는 쉽게 블로킹을 하고, 

반대로 제가 스파이크를 때리면 잘 막지못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중 6학년때 동주여중 농구부 감독님이 오셔서 ‘농구를 하지않겠냐?’고 권유하셨어요. 

그때는 거절했습니다. 농구가 생소하기도 했지만 감독님이 왠지 무서워 보였어요. 

제가 겁이 많고 여린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중학교 올라갈 때 초등학교 겨울방학때 다시 오셨어요. 

그동안 저를 쭉 지켜보고 계셨나봐요. 한번 보기나 해보라고 체육관으로 데려가셨어요. 

그리고는 농구 골대를 보여주시면서 ‘너는 키가 크니까 골밑에서 서있다가 이렇게 넣기만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선수들과 경험삼아 훈련을 같이했는데 한동안 다른 것은 안하고 계속 뛰기만했어요. 

답답해서 감독님에게 ‘골대에 공은 언제 집어넣나요?’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농구부에 들어와야 공을 집어넣지’라고 대답해주셔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어요.(웃음)


Q.워낙 장신의 유망주라서 중학교 졸업반 무렵부터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다고 들었어요.


어쨌든 관심가져주는 곳은 무척 많았는데 숭의여고가 특히 그랬어요. 

당시 숭의여고는 박찬숙이라는 대단한 선수가 이끌고 있었는데 졸업을 하게 됐고 그 뒤를 이을 기둥으로 저를 선택한것이죠. 

당시 신장이 190cm를 넘어갔어요. 지금도 큰 키지만 그때 평균 신장을 생각한다면 엄청나게 컸다고 보면되요. 

점프도 거의 하지 않고 머리 위에서 공을 흔들기만해도 대부분 선수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요. 

어쨌거나 대부분은 제가 동주여중 출신이니까 자연스럽게 동주여상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나봐요.

 하지만 숭의여고에서 관심이 대단했고 졸업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던 어느날 감독님이 저를 데리고 함께 서울로 올라갔어요. 

사실상 고등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는 감독님 집에서 숨어지내며 훈련도 하고 생활했죠. 

동주여중과 동주여상에서는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난리가 났었다고 들었어요.

 제 의견을 떠나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숭의여고를 갈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저뿐 아니라 당시에는 그런식으로 007 스카우트 전쟁이 매우 심했어요.


Q.지금도 장신이지만 당시 선수들 사이즈를 생각하면 정말 큰 키었어요.


당시 농구부가 한국화장품하고 자매결연같은 것을 맺었어요. 관계자들이 와서 지켜보더니

 ‘이선수를 빨리 키워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시 기본기같은 것이 많이 부족했거든요. 

제가 키가 크지 않았다면 그 정도 기본기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겠죠.

 일찍부터 실업팀에서 지켜보고 지원해줬고 고등학교 2학년때 첫 국가대표로 뽑히게 되었어요. 

제가 기량이 탁월했다기 보다는 장신이 부족했던 대표팀 사정과 맞물렸던 것 같아요. 

당시 대표팀 골밑의 에이스는 단연 박찬숙 선배였지만 신장에서 살짝 아쉬움이 있었어요. 

프로필상은 190cm로 나오지만 그보다 더 작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어쨌든 키가 큰 덕분에 일찌감치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죠. 

기량이 빼어난 언니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에게도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10년을 대표팀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제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을 달게되었죠.


Q.농구대잔치에서 여자농구 한 경기 역대 최다 득점인 52득점을 기록하셨어요. 

소위 손끝 감각이 좋은 날이었나요?


정정할께요. 52득점이 아니라 59득점이에요. 

인터넷 등에서는 52득점으로 나와있는 곳이 많다는데 제가 알기로는 59득점이 맞습니다. 

말씀하신데로 그날 손끝 감각이 좋았습니다. 공을 잡으면 평소보다도 더 림이 크게 보였어요. 

감독님께서도 그걸 알아차리시고서는 ‘공 잡으면 영희한테 빨리줘라’고 동료들에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동료들이 계속 저한테 공을 줬고 정신없이 득점을 성공시켰던 기억이 나요. 

그날 워낙 득점을 많이하니까 상대 수비가 4명까지 붙었어요. 

그리고는 ‘제발 그만좀 득점해’라고하면서 옆구리를 막 꼬집더라고요.(웃음) 

그렇지않아도 많이 꼬집혔던 편인지라 경기 끝나고 나면 옆구리 쪽에 

꼬집힌 자국이 가득했는데 그날따라 더 많이 꼬집혔어요.


Q.득점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한 경기 역대 최다 75리바운드에요. 

지금도 믿기 힘들 정도인데, 기록을 세웠던 당시가 기억나세요?


경기 끝나고 개수를 듣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제가 키가 커서 리바운드 쟁탈전 등에서 

많이 유리한 편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75개를 잡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오래전 일이라 세세한 상황까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않지만 슛 실패 후 

다시 잡아서 넣고 그런식의 리바운드도 많았을거에요. 몇 번씩 잡고 잡고 했죠.


“찬숙 언니와 라이벌요? 말도 안됩니다”


Q.1983~84년 농구대잔치에서 소속팀 한국화장품의 우승을 합작하는 등 가드 박양계와 콤비로 유명했습니다. 

잘 모르시는 팬들을 위해 옛 동료 박양계는 어떤 선수였는지 설명부탁드려도 될까요?


박양계 언니는 매우 뛰어난 가드였습니다. 스피드도 좋고 패스도 아주 받기 편하게 줬어요.

 어찌나 그렇게 빠르고 센스가 뛰어난지…, 같은 팀원이지만 신기할 정도였다니까요. 

언니도 키 큰 제가 부러운 부분이 있었겠지만 저 역시 언니의 그런 플레이가 엄청 감탄스러웠어요. 

국내에서 손꼽히는 야전사령관이었다고 보면되죠. 아쉽게도 유명세를 엄청 떨칠 수 있었던 LA올림픽에 출전을 못했어요. 

기량은 당연히 충분한데 그때 발목을 다쳤던 것 같아요. 정말 아쉬웠죠. 

언니가 다쳤을 당시 어디를 갈 때면 제가 항상 업고다녔어요. 경기장 등등 마치 엄마가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웃음) 한팀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다보니 서로 눈빛만봐도 다음 플레이를 펼쳐나가는게 가능했어요.


Q.우승당시 득점, 리바운드 등 무려 5개 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고 MVP까지 차지하셨어요.


그때 너무 기쁜 순간이었던지라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팀성적과 개인기록을 모두 잡았으니까요. 올림픽 은메달과 더불어 제 생애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죠. 

사실 올림픽 때는 많이 뛰지는 못했어요. 저는 받쳐주는 역할이었죠. 

하지만 이때는 제가 정말 많은 부분에서 활약을 하며 중심에서 활약했던지라 또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Q.태평양화학의 센터 박찬숙과 치열한 골밑경쟁을 벌인 것으로 들었습니다. 

국내선수 중에서는 역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적수였겠죠?


그때 대표팀 감독님이 라이벌 구도같이 만들어놓은 부분도 커요.

 솔직히 제가 실력적으로 (박)찬숙 언니에게 되나요. 키만 좀 컸을 뿐 스피드, 경험, 

센스, 몸놀림까지 앞서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

 언론 등에서 라이벌같이 언급한 것은 그만큼 제가 자극받아서 빨리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되었을거에요.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겠지만 그때도 특정 선수에게 골밑을 의지하는 부분이 컸으니까 

저같은 장신자가 기량이 올라와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두터워질 수가 있었겠죠. 

제가 건강문제가 생겨서 기대만큼 성장하지못했지만 설사 잘 컸다고 하더라도 찬숙 언니를 이기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찬숙 언니와 붙게되면 늘 ‘오늘도 한수 배우자’라는 마음으로 나섰어요. 

선배라 겸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언니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아마도 여자농구에 관심많은 분들은 아실거에요. 시간이 오래 지나기는 했지만 박찬숙이라는 선수가 어떤 선수였는지. 

만들어서라도 한때의 라이벌같이 포장된 것에 대해서는 넘치는 훈장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Q.앞서 언급한 가드 박양계, 센터 박찬숙 외에 당시 함께 리그를

 뛰면서 ‘우와! 진짜 잘한다’고 느낀 선수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우리 팀은 아니었지만 상업은행의 최애영 선수가 생각납니다. 

이분도 LA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중 한분이셨죠. 찬숙 언니랑 동기인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돌아가신 상태죠. 

그리고 한국화장품에 전미애 선수라고 있었어요. 몸놀림이 참 민첩하고 센스가 넘쳤던 플레이가 기억납니다. 

그리고 성정아 선수도 대단했습니다. 저보다 후배인데 정말 힘이 좋았어요. 

좀처럼 골밑에서 밀릴 줄을 모르고 체력까지 좋아서 여러 가지로 부러운 부분이 많았죠. 

저의 신장에 성정아 선수의 힘과 체력이 합쳐졌다면 

완전체 센터가 탄생하지 않았을까요.(웃음) 후배지만 존경하는 선수입니다.


Q.농구같은 경우 타고난 신체적 특성상 아무래도 동양선수가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신장을 떠나 파워, 탄력, 기동성, 운동신경 등에서요. 

타국 선수들 특히 흑인 선수들과의 매치업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직접 흑인 선수들과 붙어보면 왜 농구를 흑인의 스포츠라고 하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양 선수들같은 경우 체격이 조금만 커도 몸놀림이 굼뜬 경우가 많거든요. 

저같이요.(웃음) 하지만 흑인 선수들은 달라요. 힘도 좋고 빠른데 거기다 탄력까지 좋아요. 

정말 고무공같죠. 감탄 밖에 안나와요. 골밑에서 몸싸움을 하다보면 힘껏 밀어도 밀리지를 않아요.


“강제 다이어트에 사우나까지…, 몸이 완전히 악화되어 버렸습니다”


Q.함께 대표팀에서 뛰어본 동료의 말을 빌려보자면,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등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희귀병의 상태를 알았다면 운동도 그렇지만 몸상태 등에서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왜 그때 몰랐을까’라는 생각에 지금도 많이 후회됩니다. 

분명 몸에 이상 신호가 오고있었는데 ‘참으면 나아지겠지’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습니다.


Q.1987년 11월 겨우 24살의 나이에 쓰러지셨어요. 훈련도중 몸에 마비가 오고 앞이 안보였다면서요?


반신마비가 왔죠. 앞도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안보였어요. 바로 대표선수 지정병원으로 실려갔어요. 

병원에서 진단을 해보니 머리에 큰 혹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왜 이제왔어! 

잘못하다가 그대로 사망할뻔했잖아’하면서 의사 선생님께서 화를 내셨던 기억이 납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주변에서도 병원을 권유한 사람은 없었고요. 

곧바로 14시간 동안 대수술을 했고 다행히 혹을 떼내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Q.이전에도 증세가 있었지만 진통제만 하루 15알 이상 먹고 버티며 운동을 계속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 관리를 했으면 하는 후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제 몸이 엉망이 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지자 한때는 제 스스로는 물론 대표팀 감독님, 

소속팀 감독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어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것도 다 내 운명이다’고 받아들이게 됐지만 한때는 모든 것이 다 싫어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진통제를 그렇게 먹어야 했을 정도면 확실히 이상했던 것이거든요. 그렇게 약을 먹고 훈련을 하면요. 

머리가 멍해집니다. 몸에 감각이 확 떨어지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것이지…’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몸상태도 안좋고 제대로 훈련도 소화못하니 경기력도 좋았을 수가 없었죠.


Q.그렇게 아프면 소속팀 감독에게 ‘아픕니다’라고 말을 할수 없었나요?


여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도 감독님에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어요. 

LA올림픽 끝나고 나서 농구대잔치 하기 전에 소속팀에 복귀하던 무렵, 

감독님께서 ‘너 왜 이렇게 살이많이 쪘냐? 미국가서 뭘 그렇게 많이 먹고 온거야’라면서 혼을 내시더라고요. 

그때 한 130kg정도 나갔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강압적으로 살을 빼라고 명령을 내리셨어요. 

물 한모금 함부로 못먹게 한거죠. 동료들에게 조차 ‘영희가 뭐 먹나 안먹나 감시해라’고 지시했을 정도에요. 

거의 뭘 먹지를 못하고 낮에 동료들 자는 시간에도 저는 찜질방 시절 등에 들어가 땀을 빼야했어요. 

몸이 많이 좋지않은 상태에서 아주 대혹사를 당했죠. 생각해보면 그때 아주 심하게 악화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래저래 힘들고 억울했어요. ‘남들하고 똑같이 먹었을 뿐이고 내가 특별히 더 먹은 것은 없는데…’

라는 생각도 들고 그때가 농구를 가장 하기 싫었던 때에요.

 어쨌든 감독님께는 무슨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웠어요. 어떤 언니는 인대가 파열되었는데도 아프다고 

말을 못하고 피가 안통할 정도로 테이핑을 강하게 한 채 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Q.이해가 안됩니다. 아무리 그 시절 그래도 ‘저 녀석이 어디가 

좀 이상한가?’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텐데요.


그러게요. 너무 억울하고 힘들었습니다. 제가 본래 살이 막 찌는 체질도 아니고 

그 힘든 대표팀훈련과 시합을 마치고 왔는데 어디서 뭘 먹고 살이 찌겠습니까.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괴롭히니까 죽고 싶을 정도로 축 가라앉더라고요.

 나중에는 제 스스로도 음식을 먹는게 힘들어졌습니다. 

대표팀에 합류하고도 죽만 먹었어요. 대표팀 감독님께서 이상하셨는지 ‘영희야,

 너 왜 죽만 먹니?’라고 물어보셨던 기억도 나요.

 어찌보면 병이 더 악화되어 버리는 상황이 되었지않나 싶습니다.


Q.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드셨을 것 같아요.


한탄스러웠어요. 하늘이 원망스러웠고요. 

나도 여잔데! 키만 커지면 되지 왜 다른 곳까지 커져서 몸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 

외모는 왜 자꾸 안좋게 바뀌어가지. 손발도 계속 커져서 지금 발사이즈가 320입니다. 

손도 어지간한 남자 손보다 훨씬 더 크고요. 자꾸 변해져가는 제모습이 정말 이상했어요. ‘

이건 사람이 아니라 악마의 얼굴이다’라는 생각에 3년 동안 거울을 안본적도 있습니다. 

여자로서 큰 벌을 받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어요. 

제가 그 정도로 무슨 큰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Q.마음의 상처가 오래가셨을 듯 싶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그나마 믿고 의지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5년 정도를 우울증으로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밤이 되면 너무 무서웠습니다. 한겨울에 영하 17도인데도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내기도 하는 등 제 마음을 스스로가 통제를 못하겠더라고요. 

어둠, 적막 이런 것이 두려우니까 집안에 불을 다 켜놓고 텔레비전

 소리도 크게 틀어놓은 채 쭈그려서 밤새 울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못견딜 것 같으면 밖으로 나가서 인적이 많은 길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량을 한없이 쳐다보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한두시간 정도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래도 좀 마음이 안정되더라고요.


“좀 더 오래 살면서, 함께 나누고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Q.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지금도 다 극복했다고는 못하겠지만 일단은 어떻게든 지옥같은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마을 사람들하고 어울리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처음에는 제 마음과 달리 쉽지 않았어요. 

말을 걸면 깜짝 놀라서 피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셨죠. 

그럴 때면 웃는 얼굴로 ‘제가 너무 커서 무서우시죠? 그러지 않아도 되요. 

제가 몸은 이렇게 커도 마음은 솜사탕이에요’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나면 ‘안녕하세요. 

오늘도 제가 무서우세요?’라고 능청스럽게 자꾸 다가갔어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겪어보니까 괜찮네’라면서 마음을 열어주시더라고요.


Q.지금은 친한 분들이 많아지셨나요?


많아졌어요. 제가 사는 동네에 혼자사시는 할머니들이 많으세요. 제게는 어른이자 친구같은 분들이시죠. 

처음에 그분들하고 친해지려고 호박범벅을 이용했어요. 큰솥에다가 호박범벅을 몽땅해서 할머니들이 지나가면 ‘어머니,

 저희 집에 맛있는 것 해놓았어요. 오셔서 드시고 가세요’라고 권유했죠. 

그러면 그분이 또 소문을 내는거에요. ‘저기 농구선수 집에가면 맛있는게 있다’고요. 

5평방에 일곱 분이 오신 적도 있어요. 풍성하게 해서 스뎅 그릇에다 가득 퍼서 드리고도 남았어요. 

가실 때 싸드렸죠. 저녁에 한번 더 드시라고요. 그랬더니 그분들이 다음날 아침에 찾아오셨는데 호칭이 바뀌었어요. 

‘이쁜아~ 잘 잤어? 어제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러는거에요.(웃음) 그리고는 무짠지 등 밑반찬 같은 것을 가져다 주시더라고요.


Q.음식을 나눠먹는 것은 정말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맞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노인 분들에게 잘하는 착한 사람이다’고 좋은 쪽으로 소문이 났어요.

 한번은 시장에 갔는데 오이 두 개만 달라고 했더니 야채가게 사장님이 다른 것도 같이 주시더라고요. 

‘저는 오이만 있으면 되요’라고 사양했는데 ‘노인 분들에게 잘한다는 얘기들었어.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는 서비스 팍팍 줘도 아깝지 않아’라면서 손에다 기어이 쥐어주셨어요. 

가슴이 너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사는 정이구나 싶기도 하고요.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시간이 저는 너무 즐겁습니다. 많은 위로와 의지가 되요.


Q.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목표가 궁금합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60살이고 이렇게 쭉 살아왔는데 특별한 욕심 같은 것은 없어요. 

그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살고 그정도가 소원이죠.

 더불어 제가 이렇게 살다보니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와요.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을 더 많이 돕고 싶어요.

 봉사활동도 틈틈이 참여하고 그러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네요. 

세상에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한번은 추운 겨울에 시장에 갔는데 남매로 보이는 꼬마 아이 둘이 서서 반찬가게 안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날씨도 추운데 잠바도 없이 얇은 옷 하나씩만 걸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돌아보며 ‘오빠 나 저거 먹고 싶어’하면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르키더라고요.

 보니까 소고기 장조림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바로 사주고 싶었지만 잠깐 고민이 됐어요.

갑자기 큰 아줌마가 뭐 준다고 하면 겁먹을까 싶어서요. 

그래서 일단 반찬가게에서 소고기 장조림 다섯팩을 사고 나오면서 아이들 앞에서 호들갑을 떨었죠. 

‘아이쿠, 이것 어쩌지. 소고기 장조림을 너무 많이 사버렸네. 엄마가 뭐라고 할텐데,

 얘들아. 나 이것 너무 많이 사서 남는데 너희들 먹을래. 

이대로 들고가면 집에 엄마한테 디지게 혼날 것 같아서 그래’하면서 손에다 쥐어줬어요. 

‘아줌마가 농구선수 출신이라 키가 커. 무서운 사람 아니야’라는 말을 하니까 경계심이 조금 풀어진 듯 싶었어요. 

두 아이를 데리고 근처 옷가게에 가서 파카 한 벌씩을 사줬어요. 

그리고는 다음에 또 보자 했는데 그 뒤로는 어디를 갔는지 아직까지 못봤네요.

 제가 좋은 일을 했다고 자랑하려는게 아닙니다. 세상은 아직도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저만 힘든게 아니더라고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나누면서 살고싶어요.


Q.마지막으로 선수 김영희를 지금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전 여자농구 선수 김영희입니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힘들어도 끝까지 

웃으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약속드리고 싶습니다. 다들 함께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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