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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쟁이티비 꽁머니사이트 추천 -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⑰ 히딩크 같은 지도자를 만나다

토쟁이티비 0 528 2022.03.07 21:10

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를 연재합니다.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본 기사는 점프볼 3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평생의 스승

농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지도자를 만났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분이 있다. 

전규삼 선생님과 미국인 제프 가스폴(Jeff Gausepohl)씨다. 인천 송도 중· 고등학교 6년간 코치였던

 전 선생님은 농구뿐만 아니라 인성교육과 함께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셨던 내 인생의 소중한 멘토였다.


가스폴 코치는 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첫 대표선수로 뽑아준 분이다. 멕시코올림픽에서는 모든 

경기에 베스트 멤버로 기용해 주었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많은 경험을

 쌓았고, 10년간 부동의 국가대표 주전 가드로 활약했다.


2002 월드컵에서 명감독 거스 히딩크를 만나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박지성 선수처럼 나도 가스폴 코치 

덕분에 일찍 날개를 펼 수 있었다. 파벌과 인맥의 악습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외국인 코치는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하여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했다. 가스폴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하반기였다. 고교 졸업 후

 전매청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덕분에 국가대표에 뽑혔다. 미국 전지 훈련 때 내가 선발된 것이다. 

예산 부족 때문에 10명(엔트리 12명)으로 구성되었다. 기뻤지만 두려움도 컸다. 말단은 나 혼자였다. 

대선배들 틈에서 마음고생도 만만치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땐 선수단이 볼, 주전자, 수건을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미국인 코치의 훈련 방법은 달랐다. 주5일만 훈련했다. 토, 일요일은 무조건 쉬었다. 

연습시간도 2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 나이 드신 지도자는 쉬는

 날이 거의 없고 훈련 시간도 4, 5시간이 보통이었다. 1시간 정도 체력훈련만 시키는 분도 있었다. 

농구기술 습득과 전술훈련만 시키는 미국식 훈련방식은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연습법이었다.

 장소도 선수촌이 아닌 미8군 체육관이었다. 태릉선수촌은 냉·난방 시설이 없어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워

 훈련을 못 할 지경이었다. 반면에 후암동에 있는 미8군 체육관은 최적의 시설이었다. 

훈련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연습 끝난 후 가스폴 코치 집에 가서 간식을 먹기도 했다.


20년 만의 재회

가스폴 코치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군인 사관 양성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를 졸업했다. 

그 후 장교로 임관하여 한국에서 근무했다. 학창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1943년생으로 신장이 

2m나 되는 거구였다. 가스폴 코치는 미국식 훈련과 경기 스타일을 한국 선수에게 전수해 기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게 했다. 기본기 위주에 다양한 공격과 수비기술을 전수했다. ‘매치 업 존’이라는 색다른 

수비방식을 선보였고, 효과도 있었다. 대표선수들의 기량이 날로 향상되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을 마친 후 가스폴 코치는 현지에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올림픽 참가국의 실력과

 신장의 벽은 너무 높았다.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멕시코에서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69년 방콕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역사상 첫 우승을 했다. 70년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김영기 감독의 탁월한 경기운영이 주효했지만, 미국농구를 

전수한 가스폴 코치의 지도력도 많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스폴 코치는 인정이 많은 분이다. 선수들을 친구처럼 대했고, 집으로 초대하여 간식을 함께 먹으며 

선수들과 친분을 쌓았다. 군무원인 약혼자 비키(Vicky)도 선수단을 위해 헌신했다. 2m되는 늘씬한 미녀인 

비키와 연애할 때인데, 부담 없이 대해주는 두 분을 선수들은 좋아했다. 4년 전, 비키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지금도 종종 만나는 당시 선수들이 

진솔한 뜻을 모아 미국에 조화를 보내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가스폴 부부는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생활했다. 세계 제1의 화학기업인 미국 듀폰사의 한국지사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농구 감독 경력이 한국근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1968년 멕시코에서 헤어진 후, 가스폴을 20년 만인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다시 만났다. 농구 경기장에서였다. 

반가웠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깜짝 놀랄 만큼 영어 실력이 늘었다는 칭찬도 받았다. 20년 전에는 영어 실력이

 짧아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동안 학원에 다니며 영어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극찬까지 들었다. 

과거 멕시코올림픽 대표선수 선발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와 최연장자인 김영일 선수를 제외하라는

 협회의 지시에 사표로 맞서며 관철했다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만약 올림픽에 가지 못했다면 

국가대표 발탁이 2, 3년 늦어졌고, 실망감이 커 의욕을 잃었을지 모른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가스폴 코치는 그 후 반도체 관련 회사의 부사장을 맡아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올 때마다 옛날 멤버들과 만나 

코치 시절을 회상하며 웃음의 꽃을 피우곤 했다. 부인과 사별한 후 2019년 7월에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음식을 함께 먹으며 추억을 되새겼다. 다음 해에 우리 멤버들이 미국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는데, 코로나 사태가 왔다. 코로나가 해결되면 미국에서 상면할 것을 기대해 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인복(人福)이 중요하고 무슨 일이든 사람을 잘 만나야 수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인복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이 있다. 어떤 시기에 어느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 행로가 전혀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는 비교적 인복을 잘 타고난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아마도 가스폴 코치를 만난 것도 내게 찾아온 값진 인복은 아니었을까?

 아직까지도 그 인연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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