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농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바로 제프 고스폴(Jeff Gausepohl)이다. 고스폴은 한국농구 최초의 미국인 코치다.
미8군 복무 중 1967년부터 1년 여동안 한국남자농구대표팀을 지도했다.
그 사이 우리 농구는 1967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준우승, 1968년 멕시코올림픽 본선진출 등 성과를 이루었다.
당시 맺은 인연은 50년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필자가 고스폴을 만난 건 2016년이었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KBL 외국선수 트라이아웃
현장을 찾아 반세기 만에 확 달라진 한국농구를 만끽하고 있었다.
많은 농구인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한국농구가 기술적,
이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1955년 존 번,
1959년 냇 홀먼의 경우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던 명성있는 지도자들이었다.
그 뒤를 이어 1966년 대표팀을 맡은 찰리 마콘과 1967년에 바통을
넘겨받은 고스폴은 대학시절 선수로 뛰었던 미8군 소속 장교들이었다.
고스폴의 이야기를 처음 본 것은 고(故) 조광식 기자의 「세계를 향한 도전과 창의」라는 책이었다.
LG 트윈스 초대단장이자 체육기자로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조광식 기자의 그 책에는 농구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저변을 넓혀갔는지 기술되어 있다. 고스폴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자세히 다뤄진 책으로는 2013년,
허진석 기자가 펴낸 「아메리칸 바스켓볼」도 있다. 마콘과 고스폴,
두 미국인 코치의 활약상이 자세히 담겨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만 하던 인물이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대표팀 자리를 내려놓은 뒤에도 그는 최종규,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 등 당시 대표팀에서 함께 했던 선수들과 연락하며 지내왔다.
기자가 그와 인터뷰한 2016년 7월 19일에는 “마침 타이밍이 맞아 옛 친구들도
볼 겸 트라이아웃이 열리는 라스베이거스 현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Q. 당시 대표팀은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임 코치였던 마콘과는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대학은 달랐지만 종종 경기에서 마주치곤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니 네가 좀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대한민국농구협회 동의 아래 한 달간 시범적으로 팀을 맡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뒤로는 1년 넘게 팀을 가르쳤죠. 도쿄 유니버시아드게임이 첫 대회(준우승)였습니다.
Q. 대표선수들을 만났을 때 첫 느낌은 어땠는지요?
조직력과 기본기가 좋은 팀이었습니다. 신동파라는 좋은 슈터가 있었고,
김인건이라는 훌륭한 드리블러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 제 역할을 하고 있었죠.
단지 신장과 체격 문제가 늘 아쉬웠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Q. 어떤 농구를 추구하셨는지요?
팀 농구를 선호했습니다. 득점하는 선수가 서서 공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공이 없을 때도 많이 움직여야 하지요. 그런 부분을 주입했습니다. 많은 움직임을 가져가고,
패스도 서로 자주하고 말이죠. 또 한 명에 의존하지 않고 전원이 공격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Q.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요?
1967년 유니버시아드 대회 브라질 전이 기억에 남아요.
저는 경기 전에 선수들에게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선수들은 ‘저 사람 미친 거 아니야?’하는 표정으로 절 바라보더군요. 하하.
그때 우리 팀은 풀 코트 프레스를 썼어요. 국제대회에서는 자주 쓰지 않았던 전술이었죠.
그리고는 득점이 잘 하는 선수가 공을 잡으면 파울로라도 견제를 했습니다.
이게 먹히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전반이 끝나고 나니 “우리 이길 수 있다!”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브라질에서 득점을 제일 잘 하던 친구가 박한을 치면서 퇴장을 당했어요. 그래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Q. 그 시절 최고의 선수는 누구였는지요?
신동파는 최고의 슈터였죠. 놀라울 정도였어요. 이인표는 돌파가 장점이었고,
김영일은 포스트에서 팀 플레이를 잘 해줬어요. 김인건은 리더였고,
최종규는 허슬 플레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희형은 하드 워커(hard worker)였어요.
나중에 잘 됐다고 들었는데, 초창기에는 나이가 어려서 궂은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Q. 그 뒤로도 한국을 다시 찾고, 연락도 이어갔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사업차 한국에 갔던 적이 있죠. 저는 떠날 당시 직업과 농구코치를 결정해야 했어요.
그러다 결국 떠나게 됐죠. 나중에 다시 왔을 때 서울은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갈 때마다 그때 선수들에게 “LET’S 소주”라고 말했어요. 하하.
이제는 나이가 들어 많이 마시지는 못합니다. 한국은 제게 특별한 곳이에요.
아내도 한국에서 만났고, 한국에서 청혼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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