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묻히기에 아까운 기사만 모았다.
포포투 한국판이 재발간 될 때까지 영국 최고의 풋볼매거진
'포포투'의 독점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전달한다.
'별'들의 단독 인터뷰부터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442.exclusive'를 통해 함께 한다. 기대하시라.
토트넘 훗스퍼 출신 '문어' 골키퍼 에우렐요 고메스는 포포투
'플레이어 라운지' 인터뷰에서 스트라이커로 뛰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고메스는 에데르송을 알리송보다 높게 평가한 이유를 밝히고
과거 해리 래드넵 감독과의 재미있는 일화를 공개했다.
경력: 크루제이루(2002~2004), PSV 아인트호벤(2004~2008),
토트넘 훗스퍼(2008~2014), 호펜하임(2013/임대), 왓포드(2014~2020), 데모크라타(2021~)
- 크루제이루, PSV, 토트넘, 왓포드를 거치면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비법이 무엇인가?
축구팀에 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특히 모든 팬은 그들이 팀에 쏟는 열정과 애정을 선수들이 존중해 주길 바란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 또한 팬들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간혹 일부 선수들이 이를 간과하고 팬들과 거리를 두는 경우가 있다.
팬보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축구의 낭만은 팬들에게 있다.
- '문어'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는?
로날드 쿠만의 작품이다! PSV 시절 쿠만
감독의 지도를 받았는데 내가 비테세를 상대로 좋은 활약을 펼친 날이 있었다.
그날 쿠만 감독이 언론에 내 팔이 두 개가 넘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더라.
그는 내가 마치 문어 같았다고 말했다.
- 10대까지 스트라이커로 뛰었다는 게 사실인지? 잘했는가?
골대를 눈으로 찾는 법 정도는 알았다.(웃음) 나는 17세에 처음 골키퍼를 경험했다.
당시 나는 브라질 세치라고아스에서 열린 아마추어 챔피언십에 공격수로 참가했다.
문제는 우리 팀에 골키퍼가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그마저 언젠가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책임을 지고 남은 대회 기간 골문을 지켜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해당 지역 프로팀인 데모크라타에 입단했다.
그러나 데모크라타에는 제대로 된 골키퍼 코치가 없었다.
이후 크루제이루로 팀을 옮기고 나서야 처음으로
전문 골키퍼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무려 2년이 걸렸다.
-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최초의 브라질 골키퍼다.
이후 같은 국적 후배들도 EPL에 진출해서 뿌듯할 것 같은데?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나는 내가 EPL에서 뛸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께 집을 선물하기 위해 프로 선수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셨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무려 12년의 세월을 보냈고 내 모든 경험에 감사하다.
EPL에서 많은 브라질 출신 골키퍼들이 성공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 행복하기도 하다.
- 알리송 vs 에데르송, 당신의 선택은?
두 선수 모두 특출난 골키퍼다. 하지만 굳이 뽑자면 에데르송이다.
에데르송이 발기술이 더 좋으니까. 그렇다고 알리송의 발밑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데르송의 골킥이 훨씬 정확하고 강한 건 사실이다.
에데르송은 골킥을 찰 때 짧은 패스만 연결하는 게 아니라 최전방
공격수를 향해 롱킥을 보내 위협적인 역습 기회를 만들어내곤 한다.
둘 다 선방 능력은 흠잡을 데가 없기 때문에 나는 에데르송의 발기술을 조금 더 높이 사고 싶다.
- PSV 시절 2007-08 UEFA컵 16강전에서 토트넘을 탈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날 활약이 몇 달 후 토트넘으로 이적하는 데 한몫했는지?
당연하다. 당시 나는 PSV에서 이미 환상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UEFA컵 16강전 맹활약이 있었기에 토트넘에도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특히 1차전에서 좋은 경기력으로 클린시트를 만들어냈고 분명 토트넘 역시 내 활약을 고려했을 것이다.
당시 토트넘은 새로운 골키퍼가 필요했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경험이 있는 어린 골키퍼였던 나는 토트넘에 적격이었다.
- 어떻게 토트넘으로 이적하게 됐나?
PSV와 4년 재계약을 맺고 브라질로 휴가를 떠나 있던 와중 보드진과 마찰이 생겼다.
나는 일부 남미 출신 어린 선수들에 대한 구단의 대우에 만족하지 않았다.
PSV는 그들을 영입해 놓고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 옳지 않은 행태였다.
이에 나는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인터뷰에서 특정 감독이 팀을 떠나지 않으면 내가 팀을 떠나겠다고까지 말했다.
물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결국, 그 감독이 떠나지 않아 내가 떠나야만 했다.
진심으로 PSV를 떠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후 토트넘이 내게 이적 제안을 건넸고 나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토트넘에 합류했다.
- 토트넘에 합류한 지 몇 달 만에 감독이 후안데
라모스에서 해리 레드냅으로 교체됐다. 미래가 걱정됐는지?
정말 많은 걱정이 됐다. 거의 방황 수준이었다.
나는 토트넘 이적에 합의하기 전에 토트넘 왼쪽 풀백인 질베르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토트넘으로 오라고 나를 설득했다. 좋은 감독이 있고,
팀도 환상적이라며 자신의 팀 동료가 되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런던으로 갔는데 1년 만에 질베르투와 감독이 모두 떠났다!
게다가 나는 토트넘 합류 초반에 그다지 잘하지도 못했다.
계속해서 자잘한 부상에 시달렸으나 참고 뛰기로 마음먹었다.
잉글랜드에서의 미래에 대해 크게 걱정했지만, 다행히 상황은 좋아졌다.
- 레드냅 감독은 어땠나? 재밌는 일화가 있나?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감독이다. 우리는 토트넘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확실히 레드냅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로 산드로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많았다. 산드로는 토트넘에서의 첫 경기부터 실수를 저질렀다.
중원에서 공을 잡고 돌아서려던 순간 볼턴 선수에게 공을 뺏겨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레드냅 감독은 하프타임에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말을 산드로에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맙소사...(웃음) 레드냅 감독은 온갖 좋지 않은 말들만 골라서 쏟아냈고 나는 그 말을 차마 전달할 수 없었다!
결국, "산드로, 감독님은 네가 공을 더 빨리빨리 패스하길 원하셔"라며 내 선에서 정리해야 했다.
또 하루는 레드냅 감독이 산드로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UCL 명단에서 제외됐다고 이야기했다.
산드로는 감독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다음 날 우리는 UCL 원정을 떠나기 위해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에 모였다.
문제는 산드로도 공항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레드냅 감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시 통역을 부탁했다. "이 '예스맨'한테 당장 집에 가라고 해..."
- 2010-11시즌 '그 유명한' UCL 조별리그 인터밀란 원정에서 일찍이 퇴장을 당했다.
토트넘은 가레스 베일이 해트트릭을 기록하기 전까지 0-4로 뒤져 있었는데?
하프타임에 그보다 더 기분 나쁠 수 없었다.
특히 그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동료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기분이다.
천만다행으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뒤 분위기는 확실히 밝아졌다. 베일의 미친 활약 덕분이었다.
당시 인터밀란 골키퍼였던 줄리우 세자르는 경기 후 구단주가 드레싱룸까지
찾아와 "어떻게 한 선수한테 세 골을 내줄 수 있냐"며 선수단을 비난했다고 이야기해 줬다.
- 토트넘에서 마지막 2년 동안은 거의 뛰지 못했다. 더 많은 기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더 많이 뛸 기회는 있었지만 내가 큰 실수를 했다.
당시 레드냅 감독의 첫 번째 옵션은 브래드 프리들 골키퍼였다.
그러나 프리들은 최고의 폼을 보여주지 못하며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에 패배했다.
이후 레드냅 감독은 내게 다시 1옵션으로 복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당신을 위해 뛰고 싶지 않다"라며 거절했다.
그렇게 토트넘으로 돌아갈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치기 어린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2년은 꽤나 힘든 시간이었고 나는 매일같이 내 선택을 후회했다.
토트넘이 더 이상 내게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열심히 훈련했지만, 내 태도로 인해 끝내 팀의 계획에 포함되지 못했다.
- 왓포드 이적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나는 런던에 있는 집을 떠나 산드로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내 짐들은 이미 브라질로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이대로 유럽에서의 시간이 끝날 줄 알았다
. 그런데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이틀 전 왓포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는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눴고 나는 왓포드의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다.
왓포드는 트로이 디니와 내가 주축이 돼 EPL로 승격하는 것이 목표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는 잉글랜드에서의 또 다른 6년을 의미했다.
-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소집됐는데?
가장 큰 대회인 월드컵에서 조국을 대표하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당시 브라질 스쿼드에는 카카, 페헤이루 루시우, 루이스 파비아누 등 수많은 스타 선수들이 즐비했다.
우승을 차지하지 못해 정말 아쉬웠다.
2010년 월드컵 전에는 호나우지뉴,
호나우두, 아드리아노, 호베르투 카를로스와 발을 맞추기도 했다.
나는 그 세계적인 선수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브라질을 위해 뛴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 은퇴 후에 목사가 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진행 상황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말을 지킬 날이 올 것이다.
지금도 공부를 계속 하고 있다. 다만 나는 에이전트로 아직도 축구계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몇몇 브라질 유망주들을 데리고 있기도 하다. 우선 그들부터 꿈을 이루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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