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우리가 처음 맺는 인연이다.
하나의 인연이라고 한들 서로 간 연결고리는 다양하다.
배구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만들어가는 가족들이 있다.
‘배구는 사랑을 싣고’의 첫 장을 펼쳐보려 한다.
상당한 블로킹 실력 덕에 ‘원조 거미손’, ‘황금방패’라는 별명을 얻은 방신봉.
미들블로커 포지션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을 딴 그 해 태어난 아들이 어느덧 아버지를 따라 배구 선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방신봉과 본인의 발자취를 만들어가는 방준호 부자를 만났다.
<더스파이크>가 이들과 함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가족이라는 연결고리
“친구 같은 사이죠”
오랜만에 <더스파이크>랑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방신봉 선수 생활할 때는 잡지에도 실리고 기사 인터뷰도 많이 했는데 아들과 함께 하니 또 다른 기분이 드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방신봉 16세 이하 선수들에게 배구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 선수들에게 배구를 알려주는 걸 매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방준호 선수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방준호 안녕하세요. 저는 한양대학교 배구부 윙스파이커 방준호입니다. 이제 2학년에 올라가요.
대학교 1학년을 마무리하신 소감은 어떠세요.
방준호 1학년은 재활에만 집중하느라 경기를 뛰지 못한 건 아쉬워요.
또 고등학교 때랑 확실히 체력적인 차이가 크게 느껴졌어요.
비록 코로나19 상황이었지만 학과 특성상 대면 수업도 많았기에 대학생활도 느낄 수 있었어요.
두 분은 평소에도 대화를 자주 나누시나요.
방신봉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못 만나다가 매주 외박 받아서 집에 오면 같이 밥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눠요.
방준호 저는 아버지랑 친하다고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서 이런 말 저런 말 다 하면서 지내요.
‘뭉쳐야 쏜다’에 출연을 하셨는데 특별히 출연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방신봉 ‘뭉쳐야 찬다’ 때부터 나와달라고 섭외가 있었어요.
배구는 실내 종목이다 보니 실외에서 하게 되면 위험할 것 같아 거절했었거든요.
‘뭉쳐야 쏜다’ 때 다시 섭외가 왔었는데 농구는 실내 스포츠라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농구를 하면서 배구 생각도 많이 나셨을 것 같아요.
농구에서 맡은 포지션 이름도 같았으니까요.
방신봉 선수 생활을 제가 33년을 가졌어요.
근데 은퇴를 하고 나서 한동안 자유도 만끽하고 쉬고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립더라고요.
아쉬운 마음도 커서 기회만 되면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지금 준비 중에 있어요.
나중에 프로든 아마추어든 기회가 된다면 제가 배웠던 걸 다시 알려주고 싶습니다.
방준호 선수는 코트 위에 있는 아빠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아빠를 TV로 보셨잖아요.
어떠셨나요.
방준호 처음에는 아버지가 농구를 하니 신기하고 색달랐어요.
언제 한번 춤추는 게 있었거든요. 그걸 보고 나서부터 창피해서 보기가 많이 힘들었어요(웃음).
배구라는 연결고리
“아빠는 아빠 인생을
준호는 준호 인생을 살자!”
방준호 선수가 지금 배구를 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이 상당하잖아요.
코트 위에서 배구를 하던 아버지는 본인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방준호 제가 배구를 시작하는 계기이자 지금은 멘토죠.
처음에 아들이 배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뭐였나요.
방신봉 솔직히 저는 배구 안 시키려고 했어요.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지만 특히 배구는 키가 안 크면 힘들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아들한테 야구나 축구를 하라고 했어요.
다른 종목들을 시켜봤는데 본인은 재미없다고 하더라고요.
집에 배구공이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놀더니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자기가 배구를 한다고 해서 배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 가서 시켰죠.
운동에는 소질이 있다고 느끼셨나요.
방신봉 제가 봤을 때 나쁘지 않았어요. 센스도 있고 상황에 맞게 플레이를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힘이 없었는데 지금은 힘도 많이 붙었어요.
내년부터는 경기도 뛸 기회도 생길 테니 기대하고 있어요.
배구 선수 아버지를 두셨잖아요. 배구를 하면서 많은 도움이 됐을까요.
방준호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집에 가면 감독님이 한 분 더 계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배구를 배우기가 쉬웠어요.
하지만 ‘방신봉 아들’이라는 꼬리표도 자연스럽게 따라오잖아요. 꼬리표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었을까요.
방준호 초등학교 때는 많이 힘들었는데 중학교 이후부터는 그런 건 없었어요.
방신봉 타 종목도 마찬가지지만 2대가 운동을 하면 보이지 않는 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행동을 조심해도 사람들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준호랑 이야기도 했어요. 아빠는 아빠 인생이 있고 준호는 준호 인생이 따로 있다고.
이런 거에 개의치 말자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하면서 이겨내야 된다고.
본인 의지와 노력으로 경기를 뛰는 거잖아요. 본인이 더 마음가짐을 잡고 열심히 해야죠.
두 분이서 배구 이야기를 나누실 때 누가 먼저 말문을 여시나요.
방준호 아버지가 주로 먼저 꺼내시는 것 같아요
방신봉 초등학교 때는 제가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준호도 질문도 많이 했죠.
성인이 되면서 별 이야기를 안 하는데 저도 조심스럽죠.
본인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텐데 ‘왜 아빠가 간섭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몇 번 차 타고 학교 데려다줄 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죠. 근데 디테일하게 말하진 않아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집에 자주 없었다 보니 아쉬움이 많이 있진 않으세요.
방준호 굉장히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빈자리를 많이 채워주셨어요.
아버지 경기장에도 많이 가고 어머니랑 누나랑 같이 세 명이서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어 주셨어요.
커가면서 아버지가 자주 집에 오셨어요. 어떻게든 시간 내서라도 저희랑 보내려고 하셨어요.
기억에 가장 남은 아버지와 추억은 어떤 게 있을까요.
방준호 아버지가 경기가 끝나고 시간을 내서 집에 오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 간식을 사들고 오셨어요.
간식 먹으면서 아버지한테 경기 물어본 기억이 제일 많이 남아있어요.
이제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아들이 본인의 인생을 찾아가고 있어요.
나름대로 또 아쉬움도 클 것 같은데요.
방신봉 같이 살 때는 많이 챙겨주고 좋아해 줬지만 지금은 대학교를
갔고 본인이 한 발 한 발 성장하면서 내딛고 나가는 길이잖아요.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한 감정이 더 커요. 혼자서 생활하는 거 보면 든든하고 대견하죠.
배구 선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조언도 있을까요
방신봉 꾸준한 자기 관리죠.
어렸을 때는 잘못해도 용서될 수 있어도 성인이 되면 본인이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준호한테 항상 이야기해요. 그래서 행동 잘하고 본인이 행동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줘요.
그리고 제일 걱정인 건 부상이죠. 저도 부상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지만 아들도 힘들겠죠.
모든 부모들이 마찬가지지만 부상이 제일 걱정입니다.
부자가 인터뷰를 같이 한 소감은 어떠실까요.
방신봉 좋죠. 우리 아들이 방신봉의 아들이 아닌 방준호라는 이름을 더 불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하죠.
올해가 좋은 기회니까 겨울방학 동안 열심히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배구 선수들의 꿈이 프로잖아요. 노력해서 본인의 꿈을 이루기 바랄 뿐이죠.
방준호 프로 가기 전까지는 인터뷰랑 거리가 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니 기분 좋아요(웃음).
앞으로도 더 많이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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