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튀검증사이트 토쟁이티비 - 여자 조성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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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검증사이트 토쟁이티비 - 여자 조성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토쟁이티비 0 638 2022.03.15 10:09

조성원(50‧180cm) 현 창원 LG 감독은 현역 시절 단신 스코어러로 명성을 날렸다. 

2~3번을 오가는 스윙맨 포지션을 맡았지만 신장은 어지간한 포인트가드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장신 스윙맨이 즐비하던 시절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주전급으로 뛰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신체조건이었다. 

하지만 은퇴한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단순한 한팀의 주전이 아닌 KBL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다.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 슈팅력에 엄청난

 스피드를 앞세워 KCC 왕조의 가장 날카로운 칼로 이름을 떨쳤다. 

KBL 농구사에서 매우 드물었던 유형의 플레이어로 꼽힌다.


조성원과 비슷한 캐릭터는 KBL이 아닌 WKBL에 있었다. 

조성원이 그랬듯 신장은 크지 않았지만 빠른 발과 위력적인 외곽포를

 앞세워 상대 코트를 폭격하며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로 역사를 써내려갔다.

 ‘여자 조성원’으로 불렸던 김영옥(48‧168cm)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가 어떤 유형의 선수였는지는 ‘총알 낭자’라는 별명에서부터 짐작해 볼 수 있다.

 마치 육상선수를 연상케 하는 스피드로 부지런히 코트를 헤집고 다녔는데 거기에 더해 돌파, 

슛이 모두 좋았던지라 상대팀 입장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실업 태평양화학 농구단(1993~1998)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음에도 그녀는 WKBL에서 손에 꼽힐만한 성적을 남겼다. 

정규리그 통산 425경기에서 평균 14.48득점, 3.75어시스트, 2.74리바운드, 1.56스틸을 기록했다. 

장기인 3점슛은 플레이오프까지 합치면 1,000개(1,021개)가 넘어간다. 

올스타 팬투표 최초 1위(2002년), 올스타전 최초 2회 이상 MVP, 

WKBL 최초 통합 MVP 등 굵직한 커리어도 함께 써내려 갔고 그러한 입지를

 인정받아 정선민에 이어 사상 2번째로 연봉 2억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국가대표로서도 맹활약했던 김영옥의 질주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2011년 WKBL을 떠난 후 중국리그로 갔고 2012년 소속팀 베이징 그레이트워를

창단 34년 만에 첫 우승으로 이끄는 등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 

농구대잔치, WKBL, 국가대표팀, 중국리그 등 어디서 뛰던지간에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Q.어떻게 지내세요?


올해 초등학교 입학 예정인 8살 딸을 키우면서 육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딸 돌보고, 남편 밥해주고, 그냥 어느집 가정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주부죠.


Q.따님이 골프를 치고 있다고 들었어요. 취미인가요? 아님 본격적인 코스를 밟고 있나요?


제가 너무 육아에만 집중하니까 남편이 ‘기분전환 차원에서 골프를 한번 배워 보는게 어떠냐’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운동도 할 겸 딸과 함께 골프 연습장을 갔어요. 딸이 아닌 제가 운동을 하려는 목적이었죠.

 근데 당시 6살이던 이 녀석이 급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함께해봤는데 처음 참가했던 주니어 유치부에서 우승을 하는 등 기대 이상으로 잘하는거에요. 

솔직히 살짝 놀랐어요. 지금 다니고 있는 비바체 골프 연습장에서도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무료로 지원해주고 있어요. 

엄마만이 아닌 골프 쪽에 관련된 분들의 눈에도 재능이 비쳐 졌다는 점에서 너무 기분 좋습니다.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아이가 의지가 있는 동안은 선수 쪽으로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부분은 제가 아닌 이 녀석이 얼마나 골프에 열정을 쏟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세상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본인이 좋아해야 하는 것이죠. 억지로 하게 되면 어차피 얼마 못가요.


Q.남편 분도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했다고 들었는데 

아빠 엄마 피를 두루두루 잘 받아서 운동에 소질이 있는 듯 싶어요.


확실히 운동 쪽으로 재능은 있는 것 같아요. 

생후 28개월 때 스키를 처음 접했는데 너무 잘 타더라고요. 

운동신경이라든지 센스 등이 좋아요. 대신 공부 쪽은 좀 아쉬워요.

 저희가 운동을 하기도 했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이라서 이 녀석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거든요. 

뭐랄까 성향이라고 해야 될까요. 똘망똘망 머리는 좋은 편인데 연필만 잡으면 꾸벅꾸벅 졸아요. 

이것저것 학습시켜보면 잘하기는 하지만 오래 앉아있는 것을 지루해 하더라고요. 

대신 나가서 뛰어놀라고 하면 그렇게 활발 할 수가 없어요. 운동 욕심도 많아요. 

벌써 이런 얘기하기는 빠를 수도 있겠지만 자식이기는 부모 없잖아요.

 그냥 본인이 좋아하는 쪽으로 밀어줄 생각입니다. 아이가 행복한게 최고죠.


Q.농구를 시켜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어차피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 만큼 농구도 한번 생각해보기는 했어요.

 한데 제가 용인에 살고 있는데 주변에 농구를 배울 만한 곳이 없어요.

 농구부가 있는 학교도 안 보이고 농구 교실 등도 멀리 있고요. 

그러던 와중에 골프가 덜커덕 걸려서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죠. 

운동선수들 보면 해당 종목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계획된 것보다는 우연치 않게 발을 디딘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점에서 어쩌면 딸아이에게 골프가 운명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물론 아직은 많이 어리니까 앞날은 알 수 없지만요.


Q.엄마의 빠른발 유전자를 살리지못해 아쉽지만 승부욕은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 같아요.


예전에 (이)종애가 용인대에 있었을 때 아이를 데리고

 체육관도 종종 가서 농구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랬어요.

 확실히 제가 봐도 발은 빠르더라고요. 또래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여요.

 단순히 잘 달리는 것을 떠나서 순간적으로 팍팍 채면서 나가는 동작이 아주 좋아요. 

그래도 지금은 골프가 더 좋다고 하니까 지켜봐야죠. 

발이 빠르다는 것은 하체가 살아있다는 것이니까 어떻게든 골프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이 녀석, 승부욕이 정말 엄청나요.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해요.

 ‘장난으로라도 아이랑 내기 같은 것 하지말자’고 아빠가 말했을 정도에요. 

운동선수로서 승부욕은 필수조건이기는 한데 벌써부터 너무 강해서 

걱정이 들 때도 있습니다. 승부욕 만큼은 차고 넘치는 듯 싶어요.


“중학교 진학 당시 키가 139cm였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저는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자농구부 감독님께서 제가 반 친구들과 농구하는 것을 보더니

 ‘농구를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떻겠니?’라면서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켜주셨어요.

 사실은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되었던게 함정이죠.(웃음) 감독님께서 부모님을 설득시켜서 

진행시킨 것으로 당시 초등학교 5학년 때에요. 그냥 갑자기 농구를 하라고 하니까 농구를 하게 된거죠.


Q.농구를 하게되면서 육상은 그만두게 된거네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초등학교 때는 단거리를 하다가 고등학교 때는 마라톤 대회까지 나갔어요. 

단거리, 장거리 등 다양하게 경험했죠. 성적도 나쁘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는 농구와 육상을 함께 했는데 농구부, 

육상부 모두에서 본인들 종목 하나에 집중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한 갈림길에서 결국 농구를 선택하게 된 것이죠. 

제가 몸이 마르고 잘 뛰는 체질이라 육상을 했어도 좋았을 것이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Q.부모님께서도 운동을 하셨었나요?


선수까지는 아니었고요. 아버지가 축구를 잘하셨더라고 들었어요.


Q.키가 많이 작았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중학교 진학 당시 키가 139cm였어요. ‘농구는 사이즈가 깡패다’는 말도 있잖아요. 

농구부는 커녕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작은 편이니 어려움이 적지 않았죠.

 키 문제는 이후에도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녔잖아요. 

키로 덕 보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던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육상을 하기도 했지만 일단 살아남으려면 다른 쪽에서 경쟁력을 가져가야 하는데 

스피드를 높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도 했죠. 키도 작고 발도 느리면 누가 써주겠어요.


Q.1번? 2번? 어떤 포지션을 맡았나요?


초등학교때부터 주포지션이 2번이었어요. 슈팅력이 좋은 편이라서 슈팅가드로 뛸 수 있었죠. 

사실 제가 작은 키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발이 아니라 슛이었어요. 

슛은 꾸준히 좋았는데 발은 빠르기는 했지만 체력이라는 문제가 종종 발목을 잡았어요. 

어릴 때부터 못 먹고 자라서 금세 지쳤어요. 그래서 당시 감독님께서도 많이 고민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키가 작아서 뭔가 애매한데 필요한 순간 슛을 잘 넣어주니 쓰기는 하는데, 

빠른발 만큼 체력방전도 빨라버리니(?) 활용법에서 애로가 있었던 것이죠.


Q.한창 성장기에는 잘 먹고 관리도 잘해야 되는데 이 

부분이 체력 문제는 물론 신장에도 영향을 줬을 것 같아요.


없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키워야 됐어요. 

하나하나 신경쓰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키가 180cm가 넘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남동생도 키가 188cm에요. 절대 작은 집안이 아니었던 것이죠. 

저는 좀 못 먹고 자란 편이라 딸들 중에서도 중간 정도 밖에 안됐어요.

 어머니께서도 그게 늘 미안하셨던 것 같아요.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서 미안해

 죽겠는데 하필이면 제일 연약하고 몸도 약한 아이를 운동을 시키냐’고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어요.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체격 등을 떠나 제가 육상도 했었고 운동신경이 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Q.신장을 뛰어넘는 근성을 통해 고등학교 때부터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농구부원들을 중학교로 보낼 때 ‘넌 키가 작아서 안돼.

 너는 운동 스타일이 아니야’ 등 나름대로 혹독한 평가를 하시면서 올려보냈어요. 

아마도 정말 중요한 시기니까 그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그럼 저도 안되겠네요? 저는 키가 너무 작으니까요…

’라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너는 해도 돼. 눈빛도 좋고 깡이 있어’라면서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 

어릴때부터 신체조건은 좋지 못했지만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근성,

 승부욕 그런 것이 되게 강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도 그런 것을 좋게 봐주신 것 같고요.


“여자 조성원?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Q.태평양에 입단해 한창 에이스가 되려던 시점에서 

팀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충격이 컸을 듯 싶어요.


컸죠.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 선수들이 충격이 컸습니다. 

이제야 안정적으로 운동할 수 있겠다싶었는데 날벼락 같은 소리가 날아들었으니 많이 힘들었죠.

 ‘이제 어떡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특히나 팀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대였어요. 

어지간하면 이 팀에서 뼈를 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마치 가족이 해체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Q.태평양을 인수해 창단한 신세계에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힘겹게 현대로 이적했어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 같아요.


나중에 이문규 감독님이 전화를 하셔서 ‘영옥이를 보내야 될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팀 상황상 놔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저를 가장 먼저 국가대표에 발탁해주신 것도 이문규 감독님이세요. 

저를 보내고 나서 상대 팀에서 뛰는 것을 보고 ‘너무 무서웠다’고 고백하시기도 했고요.

(웃음) 당시 신세계로 팀을 옮겨갈 때 기존 선수들도 있었고 각 포지션별로 자원이 많은 편이었어요. 

가드 포지션도 두터웠고요. 좋은 선수야 많으면 좋겠지만 교통정리가 더 급한 상황이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아요. 

제가 완전히 포텐이 터지기 전이기도 했고요. 자존심 같은 것은 전혀 상하지 않았어요. 

현대로 가서 다시 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Q.현대에서 본격적으로 기량에 물이 올랐던 듯 싶어요. 보통 당시 슈터하면 받아먹는 

타입이 많았는데 이와 달리 찬스를 만들어서 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발빠른 슈터로서 이점이 많았겠죠?


가드와 슈터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에요. 슈터 역시 좋은 가드가 필요하지만, 

가드 또한 잘 맞는 슈터가 있으면 경기를 풀어나가기 정말 쉬워져요.

 여기저기 열심히 움직여주면 가드 입장에서도 패스할 곳이 넓어지니까 서로간 시너지가 날 수 있죠. 

당시 저는 국가대표가 아니었고요. 부동의 포인트가드 전주원 언니를 비롯 박명애, 

권은정 언니가 국가대표로 뛰던 시절이었어요.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으니 저는 경기중 공을 많이 만지기가 쉽지않았습니다.

 명애, 은정 언니는 받아먹는데 능한 확실한 슈터들인지라 저에게까지 좀처럼 패스가 오질 않았어요. 

워낙 잘하는 언니들이었던지라 저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요. 

어쨌든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어쩌다 한번 공이 오면 그 상황 자체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는 거에요. 

수비가 붙었다고 다시 패스를 줘버리면 언제 또 공을 잡게 될지 모르죠. 

그러다 보니 공을 잡은 순간 엄청나게 집중했어요. 

그 짧은 순간 어떻게 수비수를 제쳐야할지 엄청 궁리했고 그렇게 많은 것을 스스로 터득했던 것 같아요.


Q.그런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여자 조성원’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어요.


처음에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워낙에 잘하던 선배님이셨잖아요.

 거기에 비교가 된다는 것은 잘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명이라고 할 수 있었죠.

 마침 저희가 같은 현대가에 숙소도 같아서 종종 마주치기도 했어요. 

오히려 거기에 대해서는 선배님께서 ‘내가 영광인데’라고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원체 선배님이 슛타임이 빨랐잖아요. 저도 선배님의 플레이를 보면서 이것저것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Q.전주원과 함께 환상의 백코트를 이뤘어요. 자신보다 사이즈가 더 큰 

1번과 함께 뛰었다는 점도 이상민과 함께 뛰던 조성원과 비슷했죠.


그러게요. 남자 현대 여자 현대인데 그런 점까지 비슷했어요.

 (전)주원 언니랑 함께 플레이했던 것은 제 농구 인생에서도 행운이었죠. 

언니가 원체 패스를 적시 적소에 맞게 잘 주잖아요. 

정말이지 주원 언니 패스는 공이 손에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었어요.

 저도 거기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미리 가서 한타임

 빠르게 자리잡는 등 언니의 리딩 스타일에 녹아들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이상민 선배님과 조성원 선배님이 그랬던 것처럼 저희도 수비시 바꿔막기가 종종 이뤄졌어요. 

아무래도 주원 언니가 1번치고 신장이 크다 보니까 상대팀 스윙맨까지 

수비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대신 저는 빠른 가드를 막고 그랬습니다. 


“살아남으려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Q.권은정, 옥은희, 진미정 등 당시 함께한 동료들을 간략하게 

회고해 볼 수 있을까요? 그때를 경험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서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선수들이었죠. (권)은정 언니는 저보다 한

 살 많았는데 소속팀은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슈터로서 존재감이 대단했어요. 

빈 공간을 잘 찾아다니고 패스를 받자마자 발맞춰서 바로 슛을 던졌어요. 

정말 교과서같은 슈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옥은희 선수 같은 경우 동기들이 엄청 화려했어요. 

박정은, 김성은, 김경희, 이언주 등 질적 양적으로 좋은 선수들이 확 쏟아진 시기의 황금 

멤버 중 한축으로 평가받으며 내실있는 플레이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나간 케이스였습니다. 

신장이 좋아 센터포지션도 가능한데 거기에 슛까지 갖춰서 활용 폭이 넓었죠. 

자리도 잘 잡고 근성도 있어서 리바운드 쪽으로 기록도 세웠을거에요. 

한경기 최대 리바운드였던가.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는데 안타깝게도 허리부상으로 일찍 은퇴를 하고 말았어요.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너무 일찍 부상이라는 암초를 

만나지않았다면 더 이름도 날리고 좋은 기록도 많이 세웠을 것 같아요. 

진미정 선수는 같은 팀에서도 있었고 이후 팀을 옮기면서 상대팀 선수로도 만나고 그랬어요. 

함께할 때도 잘한다고 느꼈지만 상대 팀으로 만나니, 와우~ 정말 까다로웠습니다.

 제일 뚫어내기 어려웠던 수비수 중 한명이 진미정 선수였어요. 

발도 빠르고 힘도 좋은데다가 끈질기기까지 하니까 마크맨으로 붙으면 힘이 쭉쭉 빠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수비를 정말 잘했어요. 상대팀 주득점원을 정말 힘들게만드는 강력한 스토퍼였다고 보면 맞을겁니다.


Q.우와 오래전 일인데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계시네요. 

이왕 말나온 김에 박명애, 장화진, 정윤숙 선수까지 가볼까요.


그럼요. 제가 아주 세심한 편은 아니지만 그 선수들을 기억 못하면 농구했다고 할 수 없죠. 

그만큼 함께 농구 했던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선수들이에요.

 (박)명애 언니도 은정 언니랑 비슷했어요.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슛이 좋은 유형의 선수였어요. 

파워포워드답게 힘도 좋았고요. 드라이브인, 슈팅 등 공격옵션이 다양했던 전천후 플레이어였습니다. 

장화진은 한참 후배거든요. 현대 시절 방도 함께 쓰고 그랬어요. 

가드로서 시야도 넓고 어시스트 능력도 좋았어요. 

다만 아쉬운 것은 하필이면 같은 포지션에 주원 언니가 있었다는 것이죠. 

유망주이기는 했지만 초반에 기회를 많이 받지는 못했던 것 같고 

은퇴도 빨리 한편이라서 플레이 스타일 등에 있어서는 많이 기억하고 있지는 못해요. 

정윤숙 선수는 주원언니처럼 가드로서 신장의 메리트도 가지고 있었어요. 큰 장점이었죠.

 빠르지는 않았지만 신장을 활용한 수비도 좋았고 패스도 날카로웠습니다. 

주원 언니가 부상으로 못 뛴 시절에 빈자리를 잘 메워주면서 현대 창단 첫 우승에 톡톡히 공헌하기도 했던 기억이 나요.


Q.이렇게 들어보니까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았네요.


저희 팀도 그랬지만 타팀에도 좋은 선수들이 참 많았어요. 

최근에는 인터넷이 발전해서 잠깐 뛴 선수들도 세세하게 기록이 되고 영상도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점이 좀 취약해서 정말 잘했는데 은퇴 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뭐랄까,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지금이 농구 환경은 훨씬 

좋아졌지만 선수들의 평균적인 실력은 조금 다운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이즈는 더 좋겠지만 기량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선수가 많아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멈춰버리는…, 이유를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성과 간절함같아요. 

예전에는 못살았던 시절에 운동을 해서 그런지 ‘이것 아니면 내가 할게 없다’는

 그런 생각을 다 가지고 있었어요. 플레이 하나에도 정말 몸을 던지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죠. 

평소에 친분이 있는 선후배간에도 경기장에서만큼은 마치 원수처럼 충돌했어요.

 저 역시 후배들이 엄청 거칠게 달라붙는 통에 섬뜩할 때도 많았습니다.


Q.정말 필사적인 시절이었네요.


그러게요. 예전에 김지윤 선수가 ‘영옥 언니는 수비할 때 정말 죽일 듯이 달려들어서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하죠. 그게 제 삶이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한마디로 농구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말 이 길로 들어섰으면 죽을 각오로 해야죠. 노력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전 선수 입장에서 이런 얘기하면 ‘또 옛날 얘기냐, 언제적 근성타령이냐. 

꼰대다’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에는 선배들의 충고가 다 듣기 좋았던 것만은 아니니까요. 

예전 선배들에 비해 사이즈도 좋고 환경도 더 잘갖춰져 있으니까 조금만 더 간절함을 

가지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옛날 언니가 몇 마디 꺼내 보았습니다. 

아마도 저는 이런 성향 때문에 현장에 잘 나가지 않고 있어요. 지금도 농구에 대해서는 ‘적당히’가 안되요. 

중국 등에서 지도자 제의가 왔을 때도 가지 않은 이유에요. 저도 제 성격을 알지만 남편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도자 제의가 와도 반대를 하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육아하면서 지내는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Q.외국인 선수로는 나키아 샌포드와 엠마가 기억납니다. 어떤 스타일의 선수들이었나요?


주로 샌포드가 많이 뛰었고 엠마가 뒤를 받쳐주는 역할이었죠. 

샌포드가 워낙 잘해서 그렇지 엠마도 나쁘지 않았어요. 

샌포드가 부상 당했던 당시 엠마가 빈자리를 잘 메워줬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현대가 많이 뛰는 농구를 했던지라 훈련량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그런 경우 모든 훈련을 다 같이 하지 않고 적당히 조절하면서 

훈련하는 외국인 선수도 많은데 샌포드와 엠마는 달랐어요. 

그냥 원래부터 이곳에서 뛴 선수들처럼 끝까지 함께 했어요. 

그렇게 하면 팀 분위기도 더 좋아지고 여러모로 시너지가 올라가죠. 고마운 선수들이에요. 

샌포드가 ‘여자 맥도웰’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슛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힘이 좋고 몸싸움을 잘해서 골밑을 지켜야하는 본연의 플레이에 충실했어요.

 대다수 국내 팀들이 외국인 선수에게 가장 바라는 부분중 하나잖아요. 

골밑에서 받아먹는 득점, 리바운드 사수 등 샌포드는 거기에 완전히 잘맞는 유형이었죠.


“외국인 1번이 적응을 못해서 제가 포지션을 바꿨습니다”


Q.고향팀 춘천 우리은행으로 가서도 짧은 기간 동안에 굵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현대 시절과 우리은행 시절 중 어느 때가 더 전성기였을까요?


개인적으로는 현대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은행 때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현대 시절에 제 주포지션인 2번에서 뛰었던 탓이 커요. 

주원 언니가 워낙 1번에서 독보적이니까 저는 슈팅가드로서 제 역할만 딱 하면 됐죠. 

제가 발이 빠르다는 얘기가 현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나왔어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죽어라 뛰어다니니까 발이 안보인다는 칭찬도 쏟아졌으니까요. 

주원 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그만 틈을 비집고 패스를 넣어줘요. 정말 컴퓨터가드였죠. 

그런 언니의 패스를 받으려면 저도 열심히 뛰어다닐 수밖에 없어요. 우리은행 때는 포인트가드로 주로 뛰었어요.


Q.평생 슈팅가드로 뛰다가 포인트가드를 한다는게…,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파집니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팀 상황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외국인 선수로 백인 가드를 뽑았는데 팀에 적응을 잘못했어요. 

포인트가드는 팀원들 전체를 끌어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언어도 안되고 낯도 가리는 성격이다 보니까 본래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는 거에요. 

본인도 답답하고 힘드니까 울기도 참 많이 울더라고요. 그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그러자 당시 박명수 감독님이 ‘너는 말은 할 수 있으니까 

1번을 맡으라’고 하면서 저와 그 백인 가드의 포지션을 서로 바꿔버렸죠. 

일단 외국인 선수는 너무 좋아했습니다. 

2번에서 플레이를 펼치니까 아주 신바람을 내면서 플레이하더라고요. 저요? 어쩔 수 있나요.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으니 제가 포인트가드를 할 수밖에요.

 저도 신나게 슛을 넣고 뛰어다녀야 되는데 처음에는 참 답답하더라고요. 

그래도 현대에서 주원 언니랑 호흡을 맞춰본게 큰 도움이 됐어요.

 전체적인 부분에서는 정통 포인트가드와 차이가 많이 났겠지만 슈터를 살리려면 

어떤 타이밍에서 어떻게 공을 줘야 된다던가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죠. 

언니의 최대 장점은 화려한 패스 그런 것보다 동료들이 쉽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패스한다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냥 물 흐르듯 플레이를 펼치거든요. 정말 많이 배웠죠. 수없이 받아 먹어보니까 주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더라고요.

 포인트가드로 실패하지 않은 배경에는 언니 지분도 큽니다. 

어쨌거나, 제 자리에서 뛰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우승도 하고 했으니까 전체적으로는 만족합니다.

 제가 포인트가드도 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확인한 것도 어찌보면 소득이라면 소득인거죠.


Q.WKBL 역대 최고 선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타미카 캐칭과도 함께 했잖아요. 

옆에서 함께 플레이해본 캐칭은 어떤 선수였나요?


국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최고의 선수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WKBL에 완벽히 적응했어요. 

국내 선수들 이상으로 성실하게 훈련하는 것은 물론 본인이 

주득점원이면서도 공수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등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성격도 좋아서 팀원들과 잘 어울렸고요. 정말 완벽한 선수였다고 생각해요. 

국내 무대는 물론 중국도 가보고 그랬지만 정말 캐칭같이 모든 면에서 흠잡을데 없는 선수는 못본 것 같아요.


Q샌포드와 캐칭중 누가 더 잘했나요? 주관적인 생각으로요.


팀으로서는 장단점이 구별될 수 있겠지만, 

순수하게 개인 기량으로는 아무래도 캐칭 쪽에 기울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잘했던 선수끼리의 비교인지라 저도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막 평가할 정도의 선수들은 아니잖아요. 둘 다 대단했다고 기억됩니다. 


“억울한 은퇴, 앞이 캄캄했습니다”


Q.WKBL에서의 마지막 팀이었던 국민은행과의 좋지 못했던 마무리가 아쉬웠을 듯 싶어요. 

충분히 잘하고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2011년 FA계약에서 홀대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제가 직전 시즌에 시즌 2관왕(득점상, 3점슛상)을 했어요. 

개인 성적도 좋았고 후배들을 이끌고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여전히 한창때였던 것이죠. 

팀에서도 최우선 계약선수라고 빨리 마무리 짓자고 했어요. 농구를 하면서 제 소망 중 하나는

 ‘박수 칠 때 떠나라’였어요. 제 스스로 실력이 안된다 싶으면 당연히 팀을 위해서도, 

후배들을 위해서도 내려올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팀에서 몇 년씩 계약하자고 했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었고요. 

매 시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증명하고를 반복하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죠. 개인적으로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Q.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생겨버렸죠.


맞습니다. 전력보강을 더해서 우승에 도전해보자는 뜻을 팀에서 내비쳤고 정덕화 감독도

 ‘영옥이 원하는데로 해주라’고 말을 하는 등 여러모로 힘을 실어주셨죠.

 적어도 은퇴할 때까지 책임을 져주겠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얼마나 훈훈합니까. 

신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저도 의욕에 넘쳐서 은퇴 고민을 하고 

있던 정선민 선수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서 우승 한번 해보자고요.

 ‘어떻게 하면 이 팀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선민이를 팀에 데려온 순간 구단의 태도가 확 달라졌어요. 

일부러 다른 선수들을 위해서 나중에 연봉협상을 했었거든요. 팀을 믿었으니까요.

 한데 팀에서는 기존에 받던 연봉과 비교도 안될 만큼 턱도 없는 금액을 제시하더라고요.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이제 필요가 없으니 은퇴하라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짐 싸들고 나왔어요. 

어차피 구단에서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싸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제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온갖 막말을 쏟아내고 의자도 때려 부쉈다’는 

등 별별 루머가 터져 나왔더라고요. 감독도 ‘어떻게 됐냐?’고 물어왔는데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본인이 더 잘 알텐데…’ 그냥 더 이상 말 안 섞고 조용히 나갔어요.


Q.이해가 안됩니다. 정선민 선수가 와서 아쉬움이 덜할 

수도 있었겠지만 프로팀은 좋은 선수가 많을수록 득이잖아요.


저도 지금까지 그게 이해가 안되요. 방금 말씀하신 부분이 지극히 상식적이거든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팀도 아니고, 프로팀은 성적을 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니까요. 

제가 팀 분위기를 망치거나 함부로 행동하는 선수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 잘됐잖아요.

 거기가 선수 생명의 끝이 아니었으니까요. 확실히 끝이 좋으니까 이제는 다 추억처럼 생각하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만약 그때 그대로 은퇴해서 아무 것도 못했다면 미련, 회한 등의 감정이 남을 수도 있었겠죠.


Q.감독의 폭언과 술자리 강요를 폭로했습니다. 많은 팬들이 경악을 금치못했죠.


한참 전부터 그런 부분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이 최상의 상태로 경기를 뛰게 만들어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략이나 그런 부분은 두 번째죠. 일단 내 몸과 마음이 오직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좋은 경기력도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팀만 그랬겠냐마는 당시에는 인격모독성 폭언 등이 일상처럼 쏟아져나왔습니다. 

뭔가 관습처럼 굳어져 버린 이것을 누군가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불어 술자리 같은 경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회식을 겸한 술자리를 통해 분위기전환을 하는 정도는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지만 시즌 중 잦은 술자리는 심각하다고 볼 수 있었죠. 

술먹고 싶은 사람만 가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 오라는데 누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휴식이고 뭐고 가서 술 먹어야죠. 술자리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을께요. 

다만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 날까지 숙취가 이어지고 훈련은 물론 경기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프로는 몸관리가 생명입니다. 오히려 선수가 술을 먹는다면 감독이 혼을 내면서 자제시켜야 되는게 맞지 않을까요.


Q.어찌보면 총대를 메신거네요. 해당 발언으로 인해 향후 지도자로 가는 길 등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요.


총대를 멨다는 표현은 너무 거창하고요. 남아있는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도만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몇마디 한다고 당장 바뀔 수 있는 부분은 아니겠지만 언급이라도 해야 경각심이라도 가지지 않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발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괘씸하게 보는 분도 계실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향후 농구인으로서의 길까지 지장이 생긴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위에 계신 

어른들께서도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시는 문화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금은 그렇게 바뀌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연맹 등에서도 종종 불러주세요. 여러 행사에도 참가하기도 했고요. 

저를 나쁘게 봤다면 그렇게 불러주시지 않았겠죠. 농구판에서 정말 

열심히 살아온 농구인으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뜻밖에 살길이 생기더라고요”


Q.프로 은퇴 후 실업팀으로 가셨어요.


집에서 쉬고 있는데 김천시청 농구단 김동열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본인이 이끌고 있는 팀에 와서 좀 뛰어주면 안되겠느냐는 내용이었죠. 

이번에 성적을 내지 않으면 곤란해진다고 도와달라고 하시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승낙했어요.

 저는 무대가 어디든 농구는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레벨차이는 조금씩 존재할지 모르겠으나 서로 승부욕 불태우면서 지면 화나고 이기면 기쁜 것은 매한가지 아니겠어요. 

주변에서는 ‘프로에서 올스타급으로 뛰던 선수가 실업팀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 않냐’며 반대의 목소리도 많았어요. 

한마디로 모양 빠진다는 소리겠죠. 저는 전혀 상관없었어요. 

오히려 감독님에게 고마웠습니다

. 저를 필요로 한다는 얘기에 은퇴 이후 죽어있던 피가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어요. 

이전 구단에서는 언론 플레이를 좀 하더라고요.

 제가 많은 금액을 요구했고 돈 때문에 협상이 결렬된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어요. 

‘난 그냥 농구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됐지’라는 생각에 너무 억울했어요.

 결과적으로 그때 그 선택은 정말 잘한 결정이 되었습니다. 실업팀에서 돈을 얼마나 받았겠어요.

 단지 저를 필요로 하고 믿어주는 분을 위해서 뛴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전국체전 우승도 기뻤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 또한 소득이었죠.


Q.농구 인생의 대미를 장식한 중국리그 진출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요?


당시 되게 안좋은 상황이었어요. 구단에서 기사를 냈는데 제가 돈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나간 사람처럼 써버려 가지고 이미지도 많이 안 좋아진 상황이었어요. 

정말 억울해서 일주일을 제대로 잠도 못잤어요. 

그러고 김천시청을 간거였는데 전국체전이 열리기 전인 6월경 국제초청여자농구대회가 열렸어요. 

매년 국내 실업팀과 외국팀들을 초청해 열리는 친선대회였어요. 

본래는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김동열 감독님이 뛰어달라고 말씀하셔서 경기에 나서게 됐죠. 

그런데 그 자리에 현 중국국가대표 감독인 수리민 감독님도 계셨어요. 

당시에는 베이징 그레이트워를 이끌고 계셨죠.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저를 보자마자 ‘왜 여기에 있는 거냐?’며 깜짝 놀라시는거에요. 

프로선수가 실업팀에서 뛰는 것도 그렇고 기량도 여전히

 쓸만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시더라고요.

 더불어 저에게 ‘우리 팀으로 와서 뛰어줄 수 있겠냐? 

현재 상당수 선수들이 팀을 떠나버려서 위기에 봉착해있다. 

자칫하면 감독직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계속적으로 관심을 보이셔서 결국 수락했습니다. 

김천시청 때도 그랬지만 저는 진심으로 저를 인정해주고 필요로 한다면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성격입니다. 이런저런 조건은 그 다음 문제죠.


Q.국내리그와의 차이점으로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었죠.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노장에 대한 인식이었어요. 

한국은 선수들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해요. ‘이제 너도 은퇴할 때다, 

나이가 있으니’ 등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나이에 집착하는 경향이 커요.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해가 안됩니다. 운동선수가 나이를 먹으면 가장 문제가 되는게 무엇일까요? 기량입니다. 

어차피 사람은 나이가 들면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멀쩡하게 잘 뛰는데 나이가 많다고 노장 취급하고 눈치 주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닌 기량 하락을 신경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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