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스포츠방송 토쟁이TV - 허진석의 농담(籠談) 드디어 농구선수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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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스포츠방송 토쟁이TV - 허진석의 농담(籠談) 드디어 농구선수가 되다

토쟁이티비 0 519 2022.03.16 20:48

김영기의 ‘운동부 순회대사’ 업무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김영기가 중학교 3학년일 때의 일이다. 서울을 집어삼킨 북한군은 민족해방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인민재판을 내세운 공포정치였다. 강제동원과 징집이 이어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시민 

모두가 전쟁의 한복판에서 삶을 꾸려가야 했다. 나날의 삶을 지켜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순회대사가 방문할 운동부가 남아났을 리 없다.


전쟁은 교과서도 공책도, 김영기가 그토록 사랑한 공도 빼앗아갔다. 삶은 고단했다. 

쌀밥을 구경하기 어렵고, 보리밥과 변변찮은 반찬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떤 때는 멀건 보리죽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렸으므로,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마음껏 개구쟁이 

짓을 하며 놀아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타이를 여력조차 잃어갔다. 

김영기는 다시 골목대장으로 돌아갔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만능선수 

김영기를 따라올 경쟁자가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의 골목 안에는 없었다.


김영기의 가족은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갔다. 준비를 철저히 한 다음 남침한 북한군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여 6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UN) 연합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북진했지만 중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의 흐름은 다시 역류했다.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민간인은 

또 한 번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것이 1·4후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군과 연합군은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탈환했다. 김영기 가족은 그 해 가을 폐허가 된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의 상흔이 역력한 골목 어디에도 골목대장 김영기의 운동실력을 알아주던 친구들은 없었다. 

서울은 비어 있었다. 대전과 대구를 거쳐 1950년 8월 18일 부산으로 도망친 정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8월 15일, 국회는 9월 16일에야 서울로 복귀했다. 학교들도 대개 피란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환도(還都)를 미루고 있는 학교들을 대신해 1951년 겨울 ‘종합훈육소’가 문을 열었다.


철없는 학생들의 가슴에도 전쟁이 짓밟고 간 상처는 컸다. 종합훈육소에 나가 앉은 학생들에게서는

 공부하고 싶은 의욕도, 운동하고 싶은 의욕도 찾기 어려웠다. 김영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실의에 빠진 외톨이 소년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하릴없이 골목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종합훈육소에는 중학교 3학년으로 발을 들여놓았다가 이듬해 배재학교가 환도하자 고등학교 

1학년으로 진학했다. 전쟁은 짓궂게도 멀쩡한 김영기를 한 학년 유급시켜버린 것이다.


운동도 안정도 없는 고등학교에서의 첫 해가 지나갔다. 김영기에 대한 아버지의 단속도 어지간히 느슨해졌다. 

그러나 시간은 어떤 경우에든 고집스럽게 흐른다. 그리고 소년 김영기를 결코 그냥두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2학년이 되었다. 서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학교도 여전히 어수선했다.

어느 날 김영기는 우연히 농구 코트를 지나다가 몇몇 부원들이 훈련하는 광경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순간 가슴 속에 불길이 일었다.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었던 중학생 시절의 열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남을 느꼈다. 

김영기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책가방을 팽개치고 교복 차림으로 코트에 들어섰다.


“어이, 나도 좀 하자!”

그러자 안경을 쓴 학생 하나가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농구를 해본 일이나 있니?”

“농구해 본 일? 아니, 해본 적 없어. 하지만 붙여만 주면 열심히 해보겠어!”

비록 전쟁이 터지기 전에 운동부 순회대사를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왠지 농구만은 변덕을 부리지 

않고 끝까지 할 것 같았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 그때 배재고등학교 농구부에는 코치가 없었다. 

아직 피란지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이 기회에 

농구부에 들어가야 했다. 김영기는 무턱대고 농구부원들을 졸랐다.


“농구 안 해봤으면 곤란한데….”

“열심히 해서 따라가면 될 것 아냐! 어이, 좀 넣어 다오.”

안경 쓴 학생이 난처한지 동료들을 불렀다.

“어이!”

슛 던지는 훈련을 하던 패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 친구가 우리 부에 들어오겠다는데, 어떻게 하지?”

몸집 좋은 부원 하나가 김영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너, 몇 학년이야?”

“2학년.”

“뭐? 2학년?”

2학년치고는 너무 작다는 눈치였다.

“그래. 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키가 크니까 나도 커질 거다!”

모두 “와아!”하고 웃었다.


안경을 쓴 친구가 동정적으로 나왔다.

“어이, 붙여주자!”

“나중에 코치가 와서 뭐라고 하면 어쩐다?”

“그건 그때 문제고, 소질만 있으면 될 것 아냐?”

안경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동료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마침내 결론이 나왔다.

“어이, 너 말이야. 정 농구가 하고 싶으면 말이야, 내일부터 운동복 준비하고, 나와서 … 해!”

됐다! 김영기는 신이 나서 부원들과 돌아가며 악수를 했다. 모두 손바닥이 나무꾼들처럼 거칠었다. 

안경을 쓴 친구와도 악수를 했다. 김영기는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고마운 친구가 바로 연용모(延龍模)다.

 그는 훗날 한국방송(KBS)의 작가 겸 프로듀서가 되어 단막극을 많이 쓰고 연출도 했다.


이제부터는 매일 훈련, 또 훈련이었다. 코치도 없고 매니저도 없는 배재고등학교 농구부는 시간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훈련에 매달렸다. 훈련이라고 해 봐야 러닝 레이 업, 자유투 정도에 불과했다. 

이 엉터리 같은 농구부원에게도 유니폼이 지급되었다. 흰 러닝셔츠에 싸구려 물감을 들인 초라한 

유니폼이었다. 그래도 그 유니폼을 받아들었을 때 김영기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위아래로 어루만지며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곱게 접어 책가방 속에 모시고 다녔다. 

교과서도 공책도 도시락도 유니폼보다 더 귀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김영기와 농구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김영기는 『갈채와의 밀어』에 ‘나와 농구의 신혼생활’이라고 표현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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