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전주성에서 영웅이 되는 꿈을 꿨다.
골문 앞 이리저리로 구르다가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상대 공격수의 두 번째,
세 번째 슛을 향해 또 몸을 날리는 황인재(김천 상무) 골키퍼 이야기다.
축구의 다른 포지션보다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는 골키퍼 자리이기에 소속 팀마다 세컨드,
서드 골키퍼 수식어를 달고 다닌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바로 그 후보 골키퍼 황인재가 오래 전부터 꿈에 그리던 전주성에서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냈다.
황인재를 축구 선수로 처음 등록시킨 학교는 전북 현대 클럽 하우스가 있는 봉동의 완주중학교이며,
조금 더 커서는 전주성(전주월드컵경기장) 바로 앞에 있는 전주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항상 그의 눈앞에는 전북 현대 골키퍼 유니폼이 아른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비록 어웨이 선수 입장이지만 황인재는 김천 상무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전주성에 들어와 눈부신 슈퍼 세이브 실력을 뽐내며 게임 최우수 선수(Man of The Match)가 됐다.
양 팀 통틀어 무려 여덟 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뛴 게임에서 황인재가 군계일학으로 뽑힌 것이다.
김태완 감독이 이끌고 있는 김천 상무가 19일(토) 오후 7시 전주성에서 열린 2022 K리그 1
전북 현대와의 어웨이 게임에서 골키퍼 황인재의 빛나는 활약에 힘입어 1-1로 비기고 A매치 휴식기를 맞이했다.
황인재가 지켜낸 귀중한 승점 1
토요일 저녁 전주성 피치 위에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벤투호의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두 게임에 나서는 남자국가대표 선수들이 권창훈(후반전 교체 in)을 포함하여 여덟 명 모두 뛰었다.
K리그 6회 연속 우승 트로피를 노리는 홈 팀 전북 현대는 시즌 초반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국가대표 골키퍼 송범근을 비롯해서 왼쪽 풀백 김진수,
가운데 미드필더 김진규-백승호, 공격형 미드필더 송민규까지 모두 선발 멤버로 내보냈다.
예상대로 홈 팀 전북은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 시절이 떠오를 정도로 닥공을 펼쳤다.
18개의 슛을 김천 상무 골문을 향해서 날렸는데 무려 50%에 이르는 9개가 유효 슛이었다.
어웨이 팀 김천 상무의 슛 기록(7개 중 유효 슛 4개)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치다.
패스 성공률도 전북 현대가 85.8%(499/581개)를 기록하며 79.9%(323/404개)의 김천 상무를 앞섰다.
하지만 결과는 전북 현대가 간절히 원하는 승점 3점은 아니었다.
전북은 32분에 김천 상무의 국가대표 골잡이 조규성에게 페널티킥 골을 먼저 내주며 끌려나갔다.
70분에 나온 오른쪽 코너킥 세트 피스 기회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며 교체 선수 구스타보의 헤더
동점골(홍정호 어시스트)이 나오기는 했지만 끝내 역전 결승골을
뽑아내지는 못하고 2767명 홈팬들 앞에서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홈 팀 전북 현대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도 이기지
못한 이유는 김천 상무의 골문을 든든히 지킨 황인재 골키퍼 때문이었다.
역시 국가대표 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던 구성윤 골키퍼가 가벼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최근 김천 상무 골문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황인재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익숙한 전주의 밤 공기를 가르며 골문 이리저리 온몸을 날렸다.
게임 시작 후 11분만에 보는 이들을 모두 놀라게 하는 황인재의 슈퍼 세이브가 연거푸 빛났다.
전북의 국가대표 공격형 미드필더 송민규가 유연한 드리블 실력을 자랑하며 왼발 슛을 낮고
빠르게 날렸을 때 이 공을 바로 잡아내지 못하고 앞으로 흘렸지만 황인재는 믿기 힘든 세컨드
볼 집중력을 뽐냈다. 누가 봐도 전북 현대의 골이라 생각했지만
박진섭의 오른발 슛을 향해 황인재는 오른팔을 쭉 내밀어 막아냈다.
황인재의 슈퍼 세이브 실력은 후반전에 더 빛났다.
전북 현대 후반전 교체 선수 구스타보에게 아쉬운 동점골을 내주기는 했지만 선발로 나온
일류첸코의 골문 바로 앞 발리슛 두 개(47분, 69분)를 놀라운 순발력으로 모두 막아낸 것이다.
황인재는 2020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일류첸코와 한솥밥을 먹었기
때문에 그 슛 감각을 잘 알고 있는 골키퍼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당시 후보 골키퍼였던 황인재의 2020 K리그 공식 기록은 0뿐이다.
일류첸코가 포항 스틸러스 유니폼을 입고 당시에 게임 당 0.73골(26게임 19골)의
놀라운 능력을 자랑한 것을 떠올리면 황인재의 지금 슈퍼 세이브 행진은 더 놀랍다.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게임 막바지까지 닥공을 펼친 전북 현대는
그야말로 황인재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87분에 역전 결승골이 터지는 줄 알았지만
구스타보의 번쩍이는 오른발 터닝 슛에도 황인재가 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내던지며 그 공을 잡아냈다.
89분에도 황인재가 또 한 번 날아올랐다. 송민규의 짧은 패스를 받은 문선민이 골문 가까운 곳에서
감각적인 오른발 감아차기로 역전 결승골을 노린 것이다. 구석으로 빨려들어가는 줄 알았던
이 공도 자기 왼쪽으로 훌쩍 날아오른 황인재의 손끝에 걸려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2016년에 광주 FC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황인재의 첫 시즌 기록은 겨우 1게임이었고,
2부리그 안산 그리너스에서 두 시즌(2017년, 2019년)을 뛰면서도 합산 24게임에 머물렀다.
성남 FC의 2부리그 시절(2018년)에도 겨우 1게임만 글러브를 낀 것이 전부였다.
2020년에 포항 스틸러스로 팀을 옮겼지만 실제로 포항 스틸러스 게임에 등장한 것은 2021년 3월 21일
성남 FC와의 어웨이 게임이었으니 그에게는 기다린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프로 선수로 쌓은 기록은 일곱 시즌 31게임(안산 그리너스의 R리그 17게임 제외),
그 중에서 1부리그 선수로 찍은 기록은 단 6게임밖에 안 된다. 그가 2022년 말 군 복무를 마치고
포항 스틸러스로 돌아간다고 해도 윤평국과 강현무가 버티고 있기에 여전히 쉽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황인재에게 허락된 이번 전주성 골문 앞 모든 순간들이 더 소중했던 것이고,
그는 누구보다 그 시간의 의미를 잘 알기에 몸을 아끼지 않고 멋지게 날아올라 막아낸 것이다.
그는 다음 달 2일 김천종합운동장에서 수원 블루윙즈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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