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14시즌 동안 4개 팀에서 활약했던 ‘자칼’ 박훈근(47‧195cm)에 대한 평가다.
정규리그 통산 593경기에서 경기당 16분 06초의 출전시간을 가져가며 평균 5.1득점, 2리바운드,
1.3어시스트의 기록은 주로 식스맨으로 뛰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그저그런 백업선수가 아닌 박훈근의 성적이기 때문이다.
593경기라는 두둑한 경기 출전 횟수만이 그가 쓰임새가 많은 선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박훈근은 전천후 4번으로 불렸다. 전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골밑에서 적극적인 몸싸움과 리바운드
가담을 가져가며 파워 포워드로서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3점슛, 드라이브인 등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공격루트를 자랑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선배 전희철과 플레이 스타일이 닮았던 선수다.
전희철같은 경우 4~5번을 소화하면서도 3번에 가까울 정도로 외곽 플레이를 즐겼다. 반면 박훈근은
상대적으로 좀 더 포스트플레이를 많이 가져갔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빼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이상의 성장을 기대한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박훈근은 가지고 있는 기량에 비해 다소 불운했다. 한창 많은 출장시간을 가져가며
성장해야 될 시기마다 동포지션에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의 이름값 높은 선수가 버티고 있었고
그로 인해 주전급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틈새가 보였을 때는 부상,
트레이드 등이 발목을 잡았다. 실제로 유일하게 30분 이상의 출전시간을 보장받았던 LG에서의
1999~2000시즌 때는 평균 11.8득점, 3.7리바운드, 2.8어시스트, 1스틸로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훈근의 불운은 고려대 시절부터 이어졌다. 고교시절 그는 빅맨으로서 크지
않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서장훈에 이은 No.2 센터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가 입학한 고려대에는
이미 전희철, 전수훈의 더블포스트가 버티고 있었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캘리포니아 특급
’ 박재헌도 동기로 입학한다. 어디 그뿐인가. 1년 후에는 초특급
루키로 평가받고 있던 ‘하마’ 현주엽까지 들어오게 된다.
당시 고려대는 주전이 워낙 탄탄했던지라 식스맨들이 제대로 활약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김병철,
양희승, 전희철, 현주엽 등은 명성도 높았지만 하나같이 기록이나 출장시간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다른 대학 같았으면 충분히 주전으로 뛰고도 남을 박훈근, 박재헌, 박규현 등에
대한 안타까움의 목소리가 외부에서 계속 들려오기도 했다. 모 대학 감독은 “고려대 후보 선수
중 아무나 한명 줘도 우리 팀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 놓을 수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은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여기에 대해 박훈근은 “출장시간에
대한 아쉬움으로 힘든 시기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대 진학은 자의에 의한 판단이었던지라
후회는 하지 않는다. 더불어 넓은 인맥과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인내와 경험 등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는 말로 당시를 회상했다.
“마음은 맹장이 되고 싶지만 흐름에 맞춰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은퇴 후에 다른 쪽 일을 하는 분들도 많은데 다행히 저는 운이 좋게도 꾸준하게 농구와 관련되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농구부, 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를
거쳐 현재는 모교인 부산중앙고등학교 농구부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Q.학원 농구를 보면 감독님, 코치님이 헛갈릴 때가 많아요.
분명 하시는 역할을 보면 감독님이 맞는데 외부에서는 코치로 부르더라고요.
맞습니다. 저도 이게 지금도 의아스럽습니다. 어떤 유행어를 빗대서 말해보자면 ‘코치라 부르고
감독이라고 쓴다’고나 할까요. 예전 어떤 선배님께서도 알아보셨는데 대부분 타 종목들은 그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한데 학원 스포츠 기준 농구만 현장을 지휘하는 감독을 코치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도 감독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코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제각각이에요.
하지만 어쨌거나 학교에서 정해진 직책은 코치가 맞는거죠. 이른바 부장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감독이라는
명칭을 가져갑니다. 지금은 거의 그렇지않지만 직접 지도 현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려던
일부 분들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냐는 말도 들은 것 같아요. 솔직히 직함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뭐라고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기자님말고도 헛갈려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게 계셔서 저도 답변을 해봤습니다.
Q.하시는 일은 감독님이시지만 어쨌거나 정식 직책은 현재로서는 코치님이시니까 기사에서는 코치님으로
부를께요. 코치님이 계실 때하고 지금하고의 부산중앙고 중 어느 시절의 전력이 더 좋은가요?
누가봐도 그때가 좋죠. 그때는 16강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추승균, 박규현까지,
동료들이 워낙 좋았어요. 어느 정도 완성된 강팀이었다면 현재는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팀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열심히 해서 그렇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코치로서 할 일이기도 하고요.
Q.어떤 스타일의 지도자이실까요?
제가 저를 평가하자니 좀 어렵네요.(웃음) 보통 때는 잘 모르겠지만 지도 스타일을 보자면 엄한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어요. 훈련 할 때는 좀 더 집중해서 하자는 철학을 가지고 있거든요.
고등학교에서 농구하는 선수들은 학생이잖아요. 아직 완성된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나쁜 습관은
버리게 하고 기본기 등을 잘 갖추려면 배울 때 확실하게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학원 스포츠
지도자는 제자들에게 옷을 잘 입혀줘야 되요.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향후 선수로서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Q.이른바 요즘 학생들이라고 하잖아요. 코치님 배우실 때하고는
분위기가 달라서 강하게만 해서는 잘 안 통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제가 집중을 강조하면서 훈련을 시키는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어릴적 배울 때처럼
마냥 밀어붙이지는 않습니다.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저희 때처럼 시킨다고 무조건 따라가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강하게만 훈련을 시키다가 점차 방향성을 잡아서 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당근과 채찍’이라고 하죠.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쪽이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죠.
모든 일선 지도자가 다 비슷할거에요. 마음 같아서는 폭군이 되어서라도 제자들을 뚜렷하게
성장시키고 싶겠지만 현실은 다르죠. 제자들의 마음도 알아 줄 수 있을 때 서로간 교감도 더 잘되지
않겠습니까. 코치 초반에는 틀을 잡는 것이 좀 힘들었어요. 하지만 조금씩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틀이 만들어지니까 아이들도 잘 따라오는 것 같아요. 학생들만 배우는 것은 아니죠. 저 역시 노력하며
배워가는 중입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학부모님들도 여유를 가지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실거에요.
어찌보면 과거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그런 것에는 잘 맞아요.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시대도 아니고
학부모님들도 원하지 않는 지도법이잖아요. 장기적으로 보고 조금씩 서로가 맞춰가면서 성장하는
현재의 방식에서는 지도자, 학생, 학부모 모두에게 여유가 필요할 듯 싶습니다.
Q.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며 자녀들도 운동을 하고 있나요?
와이프와 남자 아이 중1 학생이 한명 있습니다. 용산중학교에서 현재 농구를 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은 막 두각을 나타내고 그런 모습은 아닙니다. 신체조건은 나쁘지 않지만 아직은 배울 것 투성이죠.
어느 부모든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자식이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해하는게 우선입니다.
나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 문제죠. ‘너 왜 이렇게 실력이 안 늘어?’하고
부담을 주기보다는 즐기면서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차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추승균하고 저하고 고등학교 때 누가 더 평가가 높았냐고요?”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학교 대표로 육상대회를 나간 적이 있어요. 그때 어떤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어디 학교 누구냐? 몇학년이냐?’등을 묻고 가시더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 학교로 찾아오시더라고요.
알고보니 농구부 감독님이셨어요. 저를 좋게 보셨는지 ‘농구 할 생각 없냐?’고 물어오셨어요.
사실 당시에는 농구가 뭔지도 잘 몰랐어요. 가끔 텔레비전 등을 통해 농구대잔치 본게 전부에요.
그것도 찾아볼 정도의 팬은 아니었고요. 어쨌든 한다고는 했어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운동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요. 솔직히 제 성향도 공부보다는 뛰어다니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고요.(웃음) 그래서 선생님께서 집으로 찾아오셨고 부모님을 설득하셔서 허락을 맡고 전학을
가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추)승균이가 먼저 운동을 하고 있었고 일주일 뒤에 (박)규현이가 합류했어요.
Q.가족들이 키가 큰가요?
지금도 신기해요. 저희 가족들 중에 저만 컸어요. 큰누나가 174cm, 작은누나가 165cm정도 밖에 안되요.
일반 여성 중에서 작은 키는 아니지만 막 장신 유전자가 흐르는 느낌은 안 들잖아요. 어머님도 그렇고
아버님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 골격은 좋으신 편인데 어디가서 눈에 띄고 그럴 신장은
아니었어요. 180cm가 안되니까요. 보통 이런 경우는 잘 커야 180cm중반대인데 저는 195cm까지
자랐다는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것도 돌연변이처럼 갑자기 확 큰게 아니고 프로입단 때까지 꾸준하게
컸어요. 대학 때와 프로 입단 후 신장이 차이가 나니까요. 그냥 농구를 하라는 계시였을까요?(웃음)
Q.빅맨임에도 슛이 좋고 다양한 기술을 구사했어요.
그러한 플레이 스타일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으니까 쭉 센터를 맡았어요. 어찌보면 키를 활용한 농구만 했을 법하지만
운이 좋게도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배우게 됐어요. 운이 좋다는 것은 제가 ‘나는 앞으로 이런 스타일의
농구를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장착된 것이 아닌 주변 환경이 그냥 만들어준 영향이 커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에요. 당시 선배들에게 6개월 정도 기초를 배우고 이후 감독님에게 지도를 받게 됐는데
하나같이 강조하는 것은 ‘기본기’였어요. 단순히 ‘너는 어떤 포지션이니까 이것만 해라’가 아닌 농구선수라면
다 할 줄 알아야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가르쳐주셨어요. 때문에 센터를 맡았으면서도 드리블, 패스, 슛 이런
것들을 다른 포지션 선수들과 똑같이 했습니다. 당시 부산 농구가 기본기가 참 잘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그런 시스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승균이도 보세요. 내외곽을 오가며 폭넓게 플레이하는 것을 비롯
말년에는 어지간한 가드 못지 않은 시야와 패싱 능력까지 선보였잖아요.
어릴 때부터 기본기가 탄탄하게 갖춰진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Q.추승균, 박규현과 함께하던 부산중앙고 시절 모교 농구부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가을 전국체전까지 제패하며 2관왕의 위업을 달성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진짜 무서운 것이 없었어요.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종종 이겼을 정도니까요.
그때 대학교 형들이 저희와 연습경기를 하고 난 뒤 ‘전국대회 판도는 서장훈, 현주엽의 휘문고와
부산중앙고의 2파전이다’고 평가하고는 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승균이, 규현이 등과는 눈빛만 봐도
대화가 될 만큼 손발이 척척 잘 맞았어요. 특이한 것은 저희는 3점슛을 거의 던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못 던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듯 해요. 한 경기에서
많이 나오면 2개? 평균적으로 한 개도 안될거에요. 리바운드잡고 빠르게 달려가서 속공플레이하고 포스트
인근오가며 미들슛 쏘고 그런 식의 농구를 했어요. 당시 제가 5번, 규현이가 2번 승균이가 4번을 봤습니다.
나중에 프로와서 승균이가 미들슛의 장인으로 인정받게 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까 싶어요.
Q.중앙고 시절 팀내 넘버1은 누구였을까요? 겸손한 대답보다 솔직한 답변을 원합니다.
하하핫…, 솔직한이라는 단어까지 쓰시면 제가 답을 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아지잖아요.
승균이하고 저는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면서도 달랐어요. 승균이는 워낙 득점력이 탁월한 친구였고요.
저는 센터였던지라 득점과 더불어 몸싸움, 리바운드 등 다른 부분에서도 에너지를 나누어 썼죠.
구태여 우열을 가리자면 당시 기준으로는 제가 살짝 평이 더 높았습니다.
나중에 프로가서 승균이가 워낙 대단한 선수가 되었던지라 말하는 저도 조금은 민망하네요.
“정봉섭 부장님께서 저를 장신가드로 키워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Q.소위 말하는 농구명문 빅3(연세대, 고려대, 중앙대)중 어디든지 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 가고 싶었던 학교는 연세대였어요. 딱히 다른 이유는 없어요. 서울에 올라왔을 때
연세대를 가게 됐는데 정문 인근에 독수리상이 보였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부산 촌놈 마음에
불이 확 붙었죠.(웃음) 가슴에 한번 저 마크를 차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전에 진로가
어느 정도 잡히는 경우도 많은데 저희 같은 경우 그게 좀 늦어졌어요. 연세대, 고려대 어떤 곳에서도
제대로 된 얘기가 안나오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온 학교는 중앙대였습니다.
저희가 대회를 나가면 대학 관계자분들도 종종 보러오세요. 보통은 2층에서 보시는데 정봉섭
체육부장님께서 1층 여기저기에서 보고 계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여러번 반복되다 보니까
‘우리한테 관심이 있으신가?’라는 생각은 했고 아니라다를까 중앙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어요.
조건도 좋았어요. 스카웃비는 물론 위아래 선후배들도 챙겨준다고 하고 무엇보다
저의 구미를 크게 당기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파격적인 포지션변경이었어요.
Q.파격적인 포지션 변경요? 당시가 계기가 되어서 센터에서 파워포워드로 옮겨간 것인가요?
아뇨. 그 정도면 파격이 아니죠. 당시 정부장님께서 권한 것은 가드였어요. 그분께서는 남들이 잘
안하는 여러 가지 실험도 하시고 실제로 결과도 좋았잖아요. 그때 저에게 ‘중앙대 있으면서 김유택,
한기범 트윈타워도 만들어보고 최고 가드 듀오 허재, 강동희도 성장시켰지만 아직까지 못해본 것이
장신가드다. 나이도 있고 부장 생활을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 장신가드 한명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되게 구미가 당기더라고요. 저 역시 단순히 센터로서 골밑에만 박혀있기보다는 내외곽을
오가며 이것저것 다하고 싶었거든요. 가족들과도 상의를 해보니 제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결정하라고 해주시더라고요.
Q.그런데 최종적으로 고려대를 선택했어요.
그러게요. 저의 선택이었죠. 중앙대에서 말한 조건이 좋았고 마음에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마음이
또 바뀌더라고요. 2학년 겨울 쯤 되니까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어요.
일단 제가 처음에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연세대는 제일 먼저 목록에서 지웠어요. 서장훈이 연세대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지금에서야 제가 파워포워드로 함께하면 될 것 같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세세한
포지션 구분이 없었거든요. 그냥 가드면 가드, 센터면 센터 그런 시절인지라 연세대로 가면 장훈이에게
밀려서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최종 선택지는 고려대였던 것이죠.
Q.그렇게 고려대를 갔지만 정작 출장시간은 많지 않았어요. 후회하지는 않으셨나요?
멤버가 굉장히 좋았죠. 전체 선수 중 2~3명 빼고는 모두 청소년대표 출신이었으니까 말 다했죠.
처음에 갈 때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전)희철이
형이야 자리를 완전히 굳힌 상태였고 동기로 외국물 먹고 들어온 (박)재헌이도 있었고
1년있으니까 (현)주엽이까지 들어왔죠. 거기에 당시 고려대는 두터운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주전 위주로 라인업을 돌렸던지라 백업 멤버들에게는 기회가 거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다 변명이지 않을까 싶어요. 고려대에서 저를 스카웃 한 것은
가능성을 인정하고 데려온 것이잖아요. 그렇게 왔으면 좋은 모습을 보였어야죠. 승부의 세계는
경쟁이잖아요. 쉽게 생각하면 저는 경쟁에서 밀린거에요. 정신적으로도 나약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게 인생이더라고요. 누가 저에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
언제였나고 물어보면 고려대 시절이라고 답하겠는데 반대로 가장 좋았던 시절도 고려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려대를 들어감으로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로인해 농구
외적으로도 정말 많은 것을 배웠거든요. 저에게는 인생의 큰 시계추 같은 시절이었죠.
Q.고교시절 빅맨이었던 양희승은 슈터로서 포지션 변경에 성공했어요.
혹시 코치님도 그런 변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을까요?
(양)희승이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때 센터를 봤지만 승균이랑 비슷한 스타일이었어요.
포지션만 빅맨일 뿐 득점에 능했어요. 슈팅력도 본래 아주 좋았고요. 같은 빅맨이라고해도 각자의
장단점이 다르잖아요. 희승이는 슛을 아주 잘 갖추고 있던 케이스인지라 슈터로서의 변화가 용이했죠.
희승이가 이끌던 광주고는 팀원들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고비마다 저희팀과 붙어서
고배를 마시고는 했거든요. 팀적으로는 아쉬웠겠지만 에이스였던 희승이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잘 성장 할 수 있었죠. 광주고에서 희승이의 존재감은 엄청났으니까요.
반면 저같은 경우는 잘하는 동료들과 함께 뛰다 보니까 팀 성적은 좋았지만 제가 딱 해야 할 것이 명확했죠.
승균이나 규현이도 있는데 제가 막 슛을 쏘거나 외곽을 돌 수는 없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희승이는 변화가 가능했고 저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뛰었다면 그때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요”
Q.신인드래프트 직전 세대에요. 신생팀 대학 지명 제도로 인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LG유니폼을 입었어요.
뭐…,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그럴 수밖에 없었죠. 저주받은 학번이라는 소리가 나왔던 것도
그래서였지 않나 싶어요.(웃음) 이전 선배들은 실업팀에 갈 때 적지 않은 스카웃 비용을 받을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희하고 저희 바로 윗 학번은 신생팀 창단과 맞물려 딱 걸리고 말았어요. 신생팀이 학교를
통째로 지명하면서 개인이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죠.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손해가 심했던지라 다들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엽이같은 경우 실업시절이었다면 그야말로 엄청
났을거에요. 실력은 물론 인기까지 대단했던지라 상품성이 장난 아니었잖아요. 아마도 현대,
삼성같은 대기업들간에 경쟁이 붙었을 것이고 몸값이 어디까지 올라갔을지
가늠이 안됩니다. 장훈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요.
Q.선배들처럼 스카웃 시스템의 혜택도 못받고 아래 학년들처럼 신인드래프트도 참여못하고 그랬네요.
아…, 신인 드래프트가 제 아래 학년부터 생긴 것은 저한테 외려 잘된 일이었어요. 솔직히 당시
농구에 대한 의욕이 완전히 꺾여서 그만둘까라는 생각까지 하던 시절이었거든요. 만약 신인 드래프트가
펼쳐졌다면 참여를 안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스카웃 시절 실업농구는 프로와는 많이 달랐잖아요.
어느 정도 농구를 하다가 모기업에 직원으로 취직하는 방식으로 갔거든요. 저 역시 농구를 오래하고
싶지는 않아서 적당히 하다가 은퇴 후에 직장인으로 생활하자 그런 생각이었어요. 당시 학교 선배들께서
산업은행을 많이가서 저도 내심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프로화가 되면서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것이죠.
Q.만약 93학번을 대상으로도 신인 드래프트가 지명됐다면 몇순위에 지명되었을 것 같나요?
높은 순위는 받지 못했을 것 같아요. 허리가 안 좋아서 4학년 때 경기를 거의 못했거든요.
3학년 때 국제대회 등으로 주전들이 많이 차출되어서 스타팅으로 경기를 뛰던 시기가 있었어요.
오랜만의 출격이었지만 나름 잘했어요. 인상적인 활약도 해서 기사도 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참 일이 안되려니까…,
훈련 중에 점프를 뛰는데 허리에서 뚜둑하는 느낌이 나면서 통증이 밀려오더라고요. 뭔가 싶었어요.
이후 경기들까지 참고 뛰고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가 터졌다는 말을 들고 완전 낙담해버렸죠.
이후 의욕이 확 꺾여버렸습니다. 다행히 LG가 고려대 전체를 지명하면서 저도 자연스레 거기에 포함되었고
마음을 고쳐먹게 됐어요. 몸에 칼을 되면 안된다고 해서 1년 가까이 재활을 하면서
디스크를 이겨냈죠.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도 참고 뛸만한 상황까지는 갔습니다.
Q.프로 초창기 세대라 지금하고는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랐을 것 같아요.
그렇죠. 말이 프로였지 실업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했을거에요. 당시 이충희 감독님이 대만에서
오셨는데 훈련을 정말 혹독하게 시키셨어요. 대학 시절 이상이었어요. 몇주씩 합숙하고 정말
장난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똑같은 훈련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솔직히 자신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더불어 선수들의 마인드도 프로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농구대잔치 시절은
경기수도 많지 않고 경기를 거의 특정 장소에서만 했어요. 그러다 보니 경기 끝나면 회식도 자주 하고
개인적으로 술도 먹는 등 몸 관리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프로화가 되어서 연고지가
만들어지니까 여러 지역을 돌면서 경기를 치러야 되고 체력적으로 힘들어지더라고요. 각자 알아서 몸
관리 하는 선수들이 늘어갔죠. 더불어 팀 문화라는게 있잖아요. 하지만 저희들은 창단 멤버들인지라
왕고이면서도 말단이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깨우쳐가면서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Q.완전한 빅맨도 스윙맨도 아닌 지금으로 보면 3.5번같은 플레이를 하셨어요.
그런가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의 장점은 기본적으로 4번을 보면서 이것저것 다른 포지션으로
연결시켜 주는 플레이가 된다는 것인데 당시 외국인선수가 둘이나 있는 상황에서는 제 색깔을 내기가
힘들었죠. 그나마 장단신으로 구분되던 시기는 좀 나았는데 나중에 신장합계가 되면서 대부분 팀들이
포스트에서 활약할 수 있는 선수 위주로 외국인선수를 데려왔잖아요. 저희같은 국내 4번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저같이 이것저것 다할 수 있는 유형보다는 슛 원툴 이런 선수들이
자리잡기가 더 편했습니다. 제가 잘하는 플레이는 외국인선수들의 몫이었으니까요.
Q.당시 외국인선수 2인제가 아닌 지금같은 1인 출전 제도에서 뛰었으면 더 잘하셨을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떠올라요. 외국인선수가 둘이 뛸 때는 옆에서 받아먹는 슛을 쏘거나 공을 주는
가드의 가치가 매우 높았어요. 지금은 조금 다르잖아요. 외국인선수가 한명만 나오게 되면서 국내 선수도
득점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됐어요. 퓨어가드보다 듀얼가드가 더 득세하게 된 배경에도 그런 이유도 있을
듯 싶어요. 더불어 장신 외국인선수 옆에서 높이나 득점을 분담하는 국내 4번의 가치도 많이 올라갔잖아요.
지금 시대에서 뛰었을 경우 잘했다 못했다는 장담하기 어렵겠지만
그때보다는 역할이 늘어났을 것이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죠.
“야반도주 블런트, 해외출장길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Q.상승세를 탈만하면 부상으로 기세가 꺾였던 것 같아요.
안와골절에 인대파열 등 크고 작은 부상은 좀 있었으나 다행히 은퇴할 때까지 몸에 칼은 대지 않았어요
.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는 부분이죠. 수술 직전까지 간 경우에도 재활을 택했어요. 경기력이 좋을 때
다쳐서 흐름이 꺾인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많이들 겪었던 부분이니까
특별할 것 까지는 없을 듯 싶어요. 외려 부상 외에 감독님이 바뀌시거나 트레이드
등으로 멘탈이 흔들리고 그럴 때가 더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Q.아, 다른 변수도 많았군요?
다 마찬가지일거에요. 프로 생활을 하다보면 변수의 연속이죠. 자신의 의지가 필요할 때도 있고 스스로
어떻게 하기 힘든 순간도 있고 그래요. 예를 들어 이충희 감독님 농구에 잘 적응해있다가 후임으로
새로운 분이 들어오셨는데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서 맞추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분도 제가 맞지 않다고
판단하셨는지 트레이드 하셨고요. 상황에 따라서 트레이드는 선수에게 기회로 작용하기도 해요.
저도 내심 그런 부분을 기대했고요. 하지만 트레이드 되어 간 팀에 희철이형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다시 백업 역할 밖에 못하잖아요. 모양새는 2대 1트레이드였지만 그러면 뭐해요.
정작 제가 가고 싶다고 강하게 요구하던 팀은 무시해버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다짜고짜 보내버렸는데요.
Q.가고싶은 팀이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부산 기아나 원주 삼보로 가고 싶었어요. 그곳에는 제가 열심히 하면 자리를 잡아볼만한
포지션이 비어있었거든요. 하지만 시즌 개막 3일 전인가. 트레이드됐다고 통보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마음속에 작은 희망은 있었어요. 혹시나하는 마음에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자꾸 즉답을 회피하고
말을 돌리는거에요. 그 순간 가슴이 쌔했죠. 아니라 다를까 대구 오리온스더라고요. 본인들도 알았겠죠.
거기는 제가 자리잡기 쉽지 않은 팀이라는 것을. 어차피 저에게 선택권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배려가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팀에서 우승의 감격도 맛보고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사정없는 사람 없고 실력으로 이겨내지 못한 제 잘못도 크죠.
Q.선수 생활하면서 경기적으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LG시절 삼보와의 플레이오프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제가 당시 몸 상태나 경기력이 좋았어요.
매경기 승부욕이 들끓었죠. 허재 감독님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드라이브인을 막는 과정에서 심판이
액션에 속아서 파울을 불더라고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씩씩거리면서 벤치로 퇴장하고
있는데 눈앞에 물통이 보였고 그대로 뻥하고 걷어차 버렸습니다. 근데 하필 심판이 또 그걸 봤나봐요.
테크니컬 파울이 선언되면서 상대팀에 자유투하고 공격권까지 내주게 됐어요. 분위기가 바뀌면서
7점차로 앞서는 경기가 뒤집혀버렸고 결국 역전패로 이어졌죠.
정말 미안해 죽겠더라고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습니다.
Q.초창기부터 선전하던 LG를 무너뜨린 블런트 사건 기억나시죠?
어휴…, 기억이 안날 수가 없죠. 다들 아시다시피 초창기 LG의 가장 강력한 공격옵션이 버나드
블런트의 일대일 공격이었잖아요. 저희가 자리를 싹 비켜주면 블런트가 일대일로 상대수비를
요리하고 득점을 올리고 그랬죠. 하지만 그러다 보니 득 못지않게 실도 많았어요. 일단 너무
공격을 한명이 독점했기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불만이 좀 있었죠. 더불어 다른 팀에서도 뻔한
옵션에 대한 대비를 확실하게 가져가면서 위력이 떨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이충희 감독님도 블런트
외 다른 선수들을 활용한 옵션을 계속 만들어갔어요. 하지만 득점 욕심이 많았던 블런트는 거기에
불만이 많았고 계속해서 감정적인 충돌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결국 야반도주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됐고요. 다음날 블런트가 도망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선수단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습니다.
차라리 부상이었다면 준비라도 했을텐데 갑자기 그래버리니 팀으로서는 대안이 없는 것이죠.
어쨌든 남아있는 선수들끼리 열심히 해보자고 으쌰으쌰하면서 분위기는
회복해갔지만 아무래도 팀내 득점 1옵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죠.
Q.나중에 블런트하고 우연히 마주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웃음) 삼성코치로 있을 때 해외에 출장을 갔는데 거기 숙소에서 만났어요. 어디선가 낯이
익은 아저씨가 보이길래 혹시나 해서 서툰 영어로 물어봤더니 블런트가 맞았습니다. 그때는 선수
은퇴하고 농구아카데미같은 것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양이더라고요.
자기 딸이 농구캠프에 참여해서 따라왔다가 숙소에서 마주치게 된거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박훈근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수 시절에는 메인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제가 메인이다라는 생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농구의 꽃은 프로겠지만 그러한 꽃이 잘 피기 위해서는 아마라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약하나마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열정을 모두 동원해 재능있는 아이들이 좋은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잘 다듬어 볼 생각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고요. 아마농구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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